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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쟁지선점(爭地先占) 잦은 침구로 주변국의 결정적인 목을 노린다

쟁지선점(爭地先占) 잦은 침구로 주변국의 결정적인 목을 노린다

 

고려시대 왜구의 주요 침구 대상지역은 남해안 지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차 활동범위는 넓혀져 서해와 연안지역으로 확장된다. 이곳은 곡창지대와 조운선(漕運船)의 통로로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다. 왜구가 조운선 이동 루트를 목표로 했다는 것은 왜구 전술이 항시 주요 목을 겨냥하고 있는 걸 잘 보여준다.

 

왜구는 수도인 개경 인근의 승천부(昇天府), 강화, 교동까지 자주 출몰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로인해 수도 개경이 위험해지고, 여러 차례 계엄령이 발동되었으며, 심지어는 천도론(遷都論)까지 나온다. 왜구의 발호에 따라 고려는 지역방어와 토벌작전에 주력했다. 하지만 왜구의 규모가 점차 대형화되고 빈도가 증가함에 따라 특수토벌군을 편성하거나 중앙군까지 빼내 투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책으로는 왜구를 근본적으로 근절시킬 수 없었다.

 

왜구는 약탈과 학살 만행, 그리고 조선인을 납치해서 노예화시키는 것이 본업이었다. 그 중 약탈의 최우선 대상은 조운선이었다. 13504월 왜구는 전남 순천에 침입해 남원·구례· 영광·장흥 등지의 조운선을 집중 약탈한다. 4년 후인 13544월에는 조운선 40척을, 이듬해인 13554월에는 조운선 200여척을 대거 약탈한다. 일개 도적떼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조운선은 알다시피 삼남 일대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와 공물을 실어 중앙으로 운반하는 공선(公船)이다. 즉 정부 소속 조세 운반선이다. 조운선을 통해 운반되는 조세는 국가 재정의 밑바탕이었다. 왜구의 준동으로 뱃길이 막히자 조운은 마비되고 국가 행정력은 급속히 약화되고 만다.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왜구와 맞설 수 있는 자원 공급마저 막혀 버린 것이다.

 

왜구의 약탈 행위는 계속 이어져 1358년에는 300척의 조운선이 불타 없어진다. 방대한 수의 조운선을 잃은 고려 정부는 조세와 공물을 더는 배로 운반할 수 없게 되자 1356년부터는 육로로 조세를 운반하는 조치를 취한다. 나아가 조세 창고를 내륙으로 옮겨 막힌 해로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 1376(우왕 2년 윤9)에 작성된 파조운(罷漕運) 기사에는 전라도 조세징수 체계를 조운에서 육운으로 전환한 내용이 상세히 나온다.

 

그러나 조세 운송을 육로로 하고자 한 조치는 실효성을 거두기에 어려웠다. 각처에서 징수한 10만섬 안팎의 양곡과 수많은 공물을 등짐이나 소나 말로 운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경에 있는 국고는 텅 비게 되고, 1357년 들어서는 심지어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삭감하는 예가 허다히 발생한다. 녹봉을 지급하는데 먼저 받으려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민심도 동요되었다.

 

1372년에 들어서도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고려 조정은 전라도 조운을 다시 폐지하고 육운(陸運)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을 취했어도 왜구의 침구는 전혀 종식되지 않았다. 왜구는 13722, 서해 백주(배천)의 금곡역을 침구한 데에 이어 3월에는 전라도의 순천, 장흥, 탐진, 도강 등 여러 고을을 침구했다. 그런데 이때는 시기적으로 전라도 조운이 폐지된 때였다.

 

남서해안에서 조운선을 탈취하려는 계획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왜구들은 동해안으로까지 침구지역을 확대해 나간다.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동해안 지역에 왜구가 집중 출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로써 남·서해를 넘어 동해 연변까지 침구하며 그야말로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연해안은 왜구로 휘감기게 된다.

 

 

 

 

왼쪽: 왜구는 남서해안을 중심으로 약탈 행위를 일삼아 조운선이 중단되는 사태를 가져오며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곡창 지대인 전라도는 약탈의 주 대상지였다. 사진은 장흥 회령포 인근 풍경으로 한때 왜구는 이 지역에 잦은 출몰을 해 연해 일대가 거의 텅 빌 정도였다.

 

오른쪽: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특히 14~15세기 무렵 거의 전 해역과 연변 일대는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왜구의 침구를 받았다. 이는 고려 말에서 조선초 바다가 왜구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된 상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현대 들어 독도문제로 인한 동해 상황은 영토는 물론 영해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 국토는 여전히 일본 신왜구에 의해 유린되고 있는 상황이다. 왜구와의 전쟁은 오늘날 들어서도 끝나지 않았으며, 영토·영해 문제로 더욱 격화되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왜구의 잦은 준동으로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조정은 바닷가 주변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고려 조정의 생각과 달리 행정체제의 큰 혼란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통치 질서를 크게 뒤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구는 더욱 가공할만한 규모로 침구하기 시작해 왜선 50여척으로 강화를 침입해서는 심지어 부사(府使) 김인귀를 죽이고 1천여명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왜구 금구 차 일본 막부와 교섭한 정몽주가 송환시킨 포로가 수백인이라는 점이나,고려사에 등장하는 포로의 숫자가 3만여명에 이른다는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시에도 왜군은 철수하면서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이런 전통은 훗날 태평양 전쟁시 조선인 강제 징용과 종군위안부 납치 역사로 그대로 이어진다. 대를 이어 끈질긴 왜구 침략사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왜구의 약탈대상도 이전에는 주로 식량이었는데, 사람까지도 노략질한다. 이는 사람을 사로잡아 갔을 경우,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잡혀간 장정들은 대부분 배를 젓는데 쓰이거나 잡역에 쓰였고, 고려군과의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왜구의 군사력을 이루는 병력 증강에 쓰인 것이다. 또한 일본 내 노예로 팔리거나, 다른 나라로 팔려 나갔다. 왜구들은 이를 통해 부수적으로 이익을 챙기기도 했고, 적당한 속신료(贖身料)를 받고 송환에 응하기도 했다. 일종에 다차원 협상 카드였던 것이다.

 

16세기까지도 사람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있었고, 고가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시 왜적들이 앞을 다투어 조선인 포획에 열중한 배경이 된다. 당시 포로를 얻기 위해 전쟁이 재개되기를 열망하는 일본인 무장(武將)들의 모습은 이 전쟁이 사람 사냥 전쟁으로 불렸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와 관련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일본 측 기록이 있다.

 

임진년 다이코(토요토미)의 뜻에 따라 귀국(조선)에 군대를 보내, 나라 안의 사람들을 남김없이 공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숨어 있던 수많은 남녀와 아이들을 본상(일본)으로 연행해 왔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하인이 없던 사람들까지 별안간 주인이 되어 기쁜 나머지, “(다이코가) 조선을 침략해 주면, 더 많은 하인을 부릴 수 있을 텐데라고 모두들 말했다.

 

이처럼 왜구는 사람을 상품으로 판단하는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처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인간 약탈은 고래로부터 극히 일반적으로 자행되어 온 것이었다. 왜구는 양식과 사람 약탈이 주요 침구 목적이었지만, 이 외에도 무엇이든 자원이 된다 싶은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약탈해 갔다. 이 같은 약탈 행위는 일본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자원 조달 방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통교 시 수없이 제기된 현안은 포로 쇄환 문제와 관련이 크다.

 

왜구가 등장한 이래 이 같은 무법적 방식이 종식된 적이 없다. 일본이 왜구를 완전히 근절시켰다고 밝힌 적도 없다. 그 최종 결과가 1592년의 임진왜란과 1910년의 조선 합방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왜구사와 일본사는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일본사의 큰 축이 왜구사과 직결되어 있다. 왜구와 일본은 끈끈한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 온 것이다. 양쪽 모두 행위 주체가 일본인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왜구는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는 왜구 활동이 종식되었다고 단언 할 수 있을까? 일본의 극우적 태도는 왜구 종식은커녕 왜구성(倭寇性)’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일 관계는 오늘날에도 왜구에 심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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