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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원칙과 방법 모두를 찾아라

by 전경일 2009. 2. 3.
 

세종의 성공적인 국가경영은 전체적인 균형에서 나왔다. 이러한 균형은 원칙과 방법 모두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양쪽 모두를 세우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경학(經學) - 이는 곧, 국가경영의 철학적ㆍ사상적 기반을 말한다. - 을 중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역사를 중시하는 경사체용(經史體用)을 수용한 것도 세종의 균형 잡인 경영 일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사체용이라 함은 ‘경(經)은 체(體)이고 사(史)는 용(用)이다.’하여 경전과 역사가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말로 역사를 통하여 국가경영의 실질적 교훈을 찾는 실용주의적 유교 철학을 말한다.


세종의 이같은 원칙과 방법 찾기는 실제 「훈민정음」 창제와 인쇄술 개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전통적인 유교적 경영 방식에 의하면, “백성은 부리기만 할 뿐, 알게 해서는 안된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論語』).”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원칙을 뛰어 넘어, 백성을 위한 민본 사상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전통적 유학의 원리에 크게 상반되지 않는 정책을 펼친다. 이는 당시 지배 사상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보편적인 문자 - 곧, ‘지식’ - 에 접근 가능한 어문과 출판 정책으로 나타난다. 백성을 업-그래이드 하기 위해 세종은 원칙을 실제에 맞게 변용해 썼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모두가 원칙과 방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한 원칙과 방법의 조화는 「훈민정음」 발표에 반대했던 최만리(崔萬理) 등 ‘한글반대파’들에 대한 대응 논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은 상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이 기득권을 대변하는 무기인 것은 변함 없다. 지금 시대가 세종이 CEO로 재임하던 15세기 초와 다른 것은 지식이 널리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에의 접근성이 과거 보다 훨씬 용이하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에도 일반인이 얼마나 ‘핵심적인 지식,’ 곧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하지만 세종 당시엔 문자야 말로 기득권층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무기’를 세종은「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통해 보편화시켜 보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오픈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지식을 전파하는 새로운 문자 체계, 즉 신개념의 O/S를 고안해 냄으로서 문자 활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혔다. 이러한 신지식의 표현 수단은 오랜 기간 그 쓰임이 미미하다가,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화 추진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국문자로 사용되게 된다. 그건 세종의 원칙과 방법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한글을 공표케 하는 지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세종은 신지식 보급에 있어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이를 관철해 나갔던 것이다.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역사서술이 진짜 원칙이다]


세종의 이러한 원칙과 방법의 포용성은 역사 서술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세종은 태조 때 편찬한 『고려사』를 수정ㆍ보완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만들게 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실록』대로 기술하려는 원칙적인 기준에 맞춘 조치였다. 이를 ‘직서주의(直書主義)’라고 한다. 이는 ‘바꿈 없이 그대로 받아 적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조선 창업의 명분도 잊지 않았다.


변계량 등이 사대명분을 고집하며 고려 왕실에 붙였던 각종 칭호, 예컨대, ‘왕(王)’과 같은 표현을 낮춰 쓰겠다고 하자, 세종은 『고려사』는 그것과 다르다며 바로 쓸 것을 지시했다. 한편, 이를 두고 변계량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세종은 결국 그를 해임해 버린다. 세종의 이러한 조치는『고려사』가 교훈서로 쓰인 2차 자료가 아니라, 원전자료로 남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역사책(史書)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를 당연한 우리의 정통 역사로 인식하여 지난 정권에 대한 폄하를 원치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역사 왜곡’에 대한 강한 거부였던 것이다.


세종이 역사를 함부로 조작해 내는 행위를 범죄시한 것은 그 자신 양심적인 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한 국가의 최고경영자로서 냉철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그랬을까?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 또한 역사 속에 평가 받게 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고려의 역사를 마음대로 조작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런 비양심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고려사에 공민왕 이하의 사적은...더 쓰고 깎고 하여...본 초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오히려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25일)


그의 역사기술은 이렇듯 철저하게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 국가의 CEO로서 그의 양심을 보다 떳떳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세종의 역사에 임하는 자세를 오늘날에 견주어 보면 과연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바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고구려 역사에 대한 뒤늦은 대응은 말할 것도 없고, 목하 국정에서 빚어지는 추악한 작태들은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행태라 보기에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하물며 사대를 근거로 한 뿌리 깊은 존주의식은 말해 무엇하리!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