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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부정가복(不正假伏) 상황이 불리하면 거짓항복으로 본심을 꾸민다

by 전경일 2019. 8. 12.

부정가복(不正假伏) 상황이 불리하면 거짓항복으로 본심을 꾸민다

일본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의 카라쿠리 문화는 왜구 전략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왜구는 상황에 따라 철저하게 그 속을 감추었다. 조선 초 태조는 왜구와 수많은 전투를 겪어본 탓에 누구보다도 왜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왜구를 일시에 금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부는 양면정책을 펼쳤다. ‘착하게 행동하면 좋게 다스리고, 도적질하면 무력으로 다스린다는 이선치선 이무제도(以善治善 以武制盜)의 정책으로 평화적 통교자와 귀화자를 우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초 대()왜구 정책은 고려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왜구 정책의 변화에 따라 태조 4년에는 기록에 최초로 항왜(降倭)’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에 보이는 항왜1395(태조 4) 정월에 투항한 표시라(表時羅)가 처음이다. 이듬해인 태조 5년에는 수 백 명이 대거 투항해 온 기록이 보인다. 그해 12월에는 만호 나가온(羅可溫) 등이 왜선 60여척을 끌고 경상도 영해(寧海)의 축산도(丑山島)에 이르러 관찰사 한상질에게 투항의사를 밝혔다.

 

우리들이 항복하고자 하오니, 만일 귀국에서 변방 한 곳을 허용해 주시고, 또 식량을 주시면 감히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도적들도 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의심의 목소리가 높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해 8월과 11월 사이 60여 척의 배로 동해안의 동래, 울산, 영해, 평해, 울진 등에 침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왜구를 포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투항을 허락한다. 그러자 왜구 괴수 5명이 수 백 명을 거느리고 모두 갑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와 절을 하고 항복하면서 사로잡았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들이 항복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왜구가 동해안 각지를 침범하자 태조가 12월초 왜구를 강력 응징하기 위해 5도의 병선을 모아 왜구의 소굴인 일기도와 대마도를 정벌한다는 정보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즉 조선군의 출정 정보를 접한 왜구들이 화를 모면하기 위해 서둘러 투항해 온 것이다. 태조는 투항한 왜구 구육(匛六) 3인을 서울로 불러 친히 접견하고 왜 항복했는지를 물었다. 이 자리에서 구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서 백성이 되려고 하옵니다.

 

이에 태조는 다음과 같이 일렀다.

 

항복하는 자가 너만이 아니며 항복을 받는 자도 나만이 아니다. 천하가 모두 너와 같은 자들이다. 가는 자는 붙들 필요가 없고 오는 자는 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너의 거취는 오직 너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네가 돌아가서 너희 무리들에게 이런 뜻을 알리라.

 

그리고 이튿날 태조는 항복한 왜인 구육과 비구시지(非㡱時知)에게 각각 만호와 백호의 벼슬을 내렸다. 왜구에게 관직까지 주면서 회유와 포옹책을 취한 것이다. 이 같은 파격적인 정책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399(정종 원년) 11월에도 왜선 7척이 평북 선주(宣川)에 이르러 투항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오자 항왜 구육을 보내 초유(招諭)케 하여 14명을 상경시켰다. 정부는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대우했고 거주를 희망하는 왜인들에게는 일정한 지역에서 살 것을 허락했다. 나아가 조선과 무역을 원하는 왜인에게는 교역을 허락하였다.

태조 때부터 실시한 회유책은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폐해도 덩달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1410년에 경상도에 거주한 왜인은 숫자만으로도 2천명이 넘었는데 그중에는 왜구를 사서 노비로 삼는 자들까지 있어서 그 수는 더욱 불어났다. 그 결과 왜인들이 점유하는 경제적 비중이 늘게 되고, 조선인과 교환하는 자도 발생했다. 심지어는 조선의 군사기밀을 일본에 제공하는 자도 나타났다. 또한 민가 부녀자에 대한 겁탈과 살인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태종 때부터는 각 도 연해변에 안치한 왜인들을 내륙의 깊고 먼 각 고을로 분산, 배치시켜 일정한 장소에서 살게 하며 통제했다. 흥리왜인이 일정한 포구에서만 무역할 수 있도록 제한해 태종 때에는 투항왜인의 수가 전대에 비해 크게 줄었다. 태종 1048일 사간원은 이들의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왜구가 경인년 이래 우리나라의 군현을 침략하고, 민간인을 살육하여, 우환이 된 것이 무척 큽니다··· 왜인의 사람됨이 성품이 사납고, 이랬다저랬다 하여 믿기 어려운데, 지금 관직을 주어 궁정에서 숙위케 하고, 이들을 사서 노비를 삼아 여러 주()나 군()에 널려 있게 하니, 이는 심히 좋지 않습니다. 또 경상도 한 도를 보더라도 그 수효가 거의 2천명에 이르는데, 민가의 남정네의 아내를 겁탈하고, 혹은 이웃 마을의 사람을 죽이니, 이것은 족히 이상지계(履霜之戒)라 할 수 있습니다. 자고로 바깥 오랑캐는 처음에는 극히 미약해도 나중에는 반드시 제어하기 어렵게 되는 법입니다. 신 등은 두렵건대, 이들 무리가 하루아침에 벌떼처럼 일어나면 강적이 될 것이라 염려됩니다. 만일 그 부모와 형제가 우리 변방을 도둑질한다면 과연 우리를 위해 그 부형을 치겠습니까? 싸움터에 나가 창()을 거꾸로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 그 자제를 사서 우리의 노비를 삼는다고 청하여 우리 주군()나 군()에 두는데, 그 마음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날에 우리 백성을 많이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비록 다 죽여도 가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왜인을 사서 노비를 삼는 것을 일체 엄금하여서 화()의 싹을 막으소서.

 

사간원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회유책을 폈지만, 많은 수의 왜인들이 진심으로 귀화하거나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활이 곤궁하거나 일본에서 살 수 없어서 조선에 온 자들이 허다했고, 심지어는 통제가 가해지자 곧바로 침략적 근성을 드러내 조선 연안을 침구하기도 했다. 자신의 욕구가 관철되지 않자 평화로운 왜인에서 약탈집단으로서 급변한 것이다. 이를 우려해 태종 105월 정부는 전() 호군 이예(李藝)에게 명해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에게 글을 보내 다음과 같이 회유했다.

 

매양 들으니 수호의 뜻을 오로지하고 항상 도적을 금한다 하니 어찌 감히 감사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에 조미 150석과 콩 150석을 배를 갖추어 실어 보내 신()을 표하는 바이다.

 

조선 정부는 ()’에 대한 표시로 양곡을 보냈지만, 대마도주 종정무는 사신으로 간 항왜 평도전에게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글로 왜()의 본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한다.

 

조선에서 우리에게 향한 정성이 지금은 예전만 같지 못하다. 예전에는 쌀 500~600석을 보냈는데 지금은 보내지 않는다. 평도전 너도 휴가를 청하여 나오는 것이 가하다.

 

둘 간에 주고 받은 서신은 종정무의 금구의 뜻이나, 평도전의 귀화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오로지 쌀이나 기타 이익을 위해 거짓 투항했던 것이다. 평도전은 태조 68월에 귀화한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후한 은혜를 입었지만, 귀화한 후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대마도를 왕래하다가 세종 원년 6월에는 대마도에 암통해 일본 측에 다음과 같이 의부하고 있다.

 

조선이 근래에 너희들을 참혹하게 박대하니 만약에 다시 변군을 침략하여 놀라게 하면 앞으로는 반드시 대접함이 처음과 같으리라.

 

조선은 회유책을 썼지만, 끝내 왜구의 본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다른 예로 태조 5년 항복해 온 항왜 라가온(羅可溫)이 있다. 그는 항복을 청해오므로 울주에서 살게 했는데 도망쳤다가 이듬 해 다시 항복을 청해 와 다시 받아 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선을 약탈해 달아났다. 이렇듯 왜인의 속심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귀화인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등 해변에 거주하는 왜인들은 흥리왜인과 내통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교역을 돕다가 사변이 있을 때에는 간첩노릇을 하며 조선 병선(兵船)의 허실을 엿보아 왜인에게 기밀을 누설하는 등 조선으로서는 이들의 본심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부산포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이 혹은 상가(商賈)라 칭하고 혹은 유녀(遊女)라 칭하면서 일본 객인과 흥리왜선이 이르러 정박하면 서로 모여서 지지하고 남녀가 섞여 즐기는데 다른 포에 이르러 정박하는 객인도 또한 와서 술을 사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여러 날 날짜를 끌면서 머물러 허실을 엿보며 난언(亂言)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흥리왜인은 조선 병선의 허실을 엿보고, 유사시 간첩 활동까지 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들을 육지 깊숙한 곳으로 옮기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왜인들의 행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인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후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숙종실록,비변사등록,동사록등 기록에는 왜인의 말은 잘 변해서 한결같지 않다(倭人變辭不一)”, “우리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모욕하려는 의도이다(經侮我國之意)”, “왜인의 성정은 이상하다(倭性異常)”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만큼 왜인들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을 강조했지만, 왜인들의 일시적인 귀화는 조선의 향화정책과 왜구의 욕구가 맞아 떨어지며 생긴 일이지, 왜구의 본질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 신뢰가 자리 잡을 여지도 별로 없었다. 일 관계에서 신뢰가 가장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 오늘날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동북아 평화운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주의와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있는 점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왜구는 지금 일본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바로미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공식 입국사증 도서(圖書)’와 무역증명서 행상(行狀)’

일본과 수교의 한 방편으로 조선은 입국 사증에 해당되는 도서(圖書)’를 발급했다. 이는 흥리왜인의 각종 폐단과 사신 왕래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세종 이후에는 입국증명서가 더 많아지고 있다.도서는 조선에서 발급한 도장, 즉 사인이고, ‘행상은 상가의 행상 증명서이다. 행상이 조선 측 기록으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태종 77월이다. 이때 경상도 병마절제사 강사덕은 흥리왜선이 각 포구에 흩어져 정박하여 병선의 허실을 엿보고 있으니 실로 미편합니다. 전번에 도절제사가 의정부에 밀고하여 좌우도 도만호가 방어하는 곳에 와서 정박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섬의 왜선에게 두루 알리지 못한 까닭에 전과 같이 각 포에 흩어져 정박합니다. 빌건데 각 섬의 거수(渠首)에게 두루 알리고 행상을 만들어 발급하여 도만호가 있는 곳에 와서 정박하게 하여 속이고 위장하는 것을 막고 체통을 세우도록 하소서라고 청하고 있다. , 흥리왜선이 도만호가 방어하는 곳에 와서 정박하는 것이 아니라, 각 포에 흩어져 정박하니 이를 규제하기 위한 일종의 행상증명서인 행상(行狀)을 발급해 달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확실한 입국증명서인 도서를 발급한 것은 세종 즉위년 11월이었다. 이때 일본 서해로 미작태수 정존(淨存)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도서 주기를 청하므로 간찰을 담당하는 관부에 명해 도서를 만들어주게 하고, 또 주포(紬布) 10필과 면포(綿布) 133필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일본과의 통교에서 입국증명서라고 할 수 있는 도서의 발급은 태종 10(1410)부터 세종 즉위년(1418) 사이라고 생각된다. 이 도서 발급은 조공무역의 신표였고, 도서 발급 후에는 무제한으로 왕래하던 사신이나 흥리왜선이 차츰 규제를 받게 되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