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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불신불측(不信不測) 기만과 불예측성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불신불측(不信不測) 기만과 불예측성으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왜구의 특징은 기만과 불예측성이다. 이는 군사 작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왜구 침구 전략으로 눈에 두드러진 것은 기만전술인데, 1375년 왜구는 무리들 가운데 노약자들만 태워 싸우지 않고 곧 철수할 것같이 행동해 고려군의 방비를 허술하게 하도록 한 다음 은밀히 정예군 수백 명을 고려군 배후로 침투시켜 노략질을 감행했다. 왜구의 이런 기만전술에 말려들어 고려군은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했고, 왜구가 온다는 소리만 듣고서도 앞을 다투어 달아났다.

 

손자병법에는 ()은 속임수()로써 서고, ()로써 움직이며 분합(分合)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 왜구가 중앙의 조직적인 지지, 지휘, 조종내지 지시 하에 움직였다는 것은 왜구의 침구 방식에 이 같은 병법적 전술이 동원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같은 왜구의 전술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는 숫한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타난다.

 

충청도에 출현한 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려군이 지리산 전투와 황산강 전투에서 각각 승리를 거둠으로써 경상도 남해안으로부터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구의 기도는 일단 저지된다. 하지만 충청도의 상황은 달랐다. 왜구의 집요한 침투작전으로 고려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3774, 왜구는 충청도 해미를 침구한 데에 이어 5월에는 기병 100여 기를 동원하여 남양, 안성, 종덕 등 제읍에 침구했다. 이후, 왜구는 경양과 안성에서 노략질을 계속했다. 이때 충청도 도원수 왕안덕은 왜구의 강한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전진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부원수(副元帥) 인해와 양천원수(陽川元帥) 홍인계를 불러 가천역(加川驛)으로 퇴각시킨 뒤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이를 요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왜구는 고려군의 이러한 기도를 간파하고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가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왕안덕은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오히려 왜구의 반격을 받아 4명의 전사자를 내고 왕안덕 자신도 창에 맞아 부상을 입는다. 이때 왜구가 충청도를 침구한 목적은 고려군을 이 지역으로 유인해 낸 다음 개경을 급습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다. 왜구의 이 같은 전술은 고려군에게 생포된 간첩의 자백에 의해서도 낱낱이 밝혀진다.

 

우리는 이렇게 의논하였다. ‘우리가 만일 양광(충청)도의 여러 고을을 침공하면 최영이 틀림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올 것이다. 그때 가서 개경이 공허한 틈을 타서 곧바로 들이치면 쉽사리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 후에도 고려군은 번번이 왜구의 기만전술에 말려들어 여러 차례 패전을 거듭했다. 안성에 침구했을 때에도 왜구는 고려군을 기만하기 위해 삼()밭에 복병을 배치하고, 포로 3~4명을 농부로 가장시켜 밭을 매게 하면서 고려군을 속이게 하였다. 수원부사(水原府使) 박승직이 이를 사실로 믿고 아무 의심 없이 관아로 들어갔다가 매복해 있던 왜구들에게 포위당하기까지 했다.

 

박승직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단기(單騎)로 탈출했으나, 그 밖의 많은 고려군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충청도에 왜구가 횡행하자, 수원-양성-안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은 사람의 자취를 아예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텅 빈 고을이 되어버렸다. 고려 공민왕 155월 판전농사(判田農寺) 설장수는 그의 상서에서 왜구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면밀히 보고하고 있다.

 

왜구가 많으면 천백 명으로 떼를 이루고, 적으면 십오명이 부대를 지어 요망하고 괴이한 묘책을 꾸미고 있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맑은 날에는 그래도 쳐들어오는 걸 보아가며 적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경계에 대비케 할 수 있지만, 어두운 밤에는 먼데까지 살펴볼 수 없어서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않는 곳으로 나와서 함부로 덤벼듭니다. 수가 많으면 허세를 부리며 교란하고, 우리의 병세(兵勢)가 나누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습격해 옵니다. 방어 초소를 피해 바로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고, 혹은 먼저 방어 초소를 습격하기도 합니다. 적으면 미리 간첩을 보내 부유한 집을 정탐한 뒤 약탈하여 관병(官兵)이 이를 알고 추격할 때쯤이면 이미 왜적은 노략질한 물건을 가득 싣고 멀리 달아나 버린 뒤입니다. 경계 인력을 철수시키면 다시 쳐들어 와 군사를 운용하는 게 용이치 않습니다.

 

설장수는 왜구의 음모 술책은 무궁무진하다병력이 많은 때에는 서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동쪽을 향해 고려군이 분산된 다음에 조용히 공격해 온다며 왜구 전술을 기만에 의한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로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왜구는 무계획적으로 침구한 것 아니라, 작전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필요하다면 첩보전도 적절하게 활용하는 등 전략과 전법에서 뛰어난 무력집단이었다.

 

왜구의 기만과 불예측성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을 꼽을 수 있다. 태종 128월 부산포에 입항한 왜선은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그들의 태도에 대해 부산포 관찰사는 왜선 17척이 와서 정박하고 있는데, 비록 흥리(興利)를 구실을 삼으나, 그 모양이 두렵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 흥리왜인은 조선, 중국, 일본 등지를 왕래하며 삼각무역을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선박을 약탈하거나 변방을 침구하는 왜구로 돌변했다. 그러다보니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상인과 도적을 오가는 왜구의 특성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행위에는 상도(商道)’라는 것이 있어 최소한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 왜구이다.

 

태종 93월에 김을우(金乙雨)가 잡은 왜인도 스스로 말하기를 도둑질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역하러 왔다며 종정무(宗貞茂)가 발급한 행장(行狀) 2장을 제시했다. 이에 왜인 20여명을 억류해 놓고 조사했는데, “배 안에 실은 물건은 모두 중국 물건이고, 또 명()나라 정해위(靖海衛)의 인신(印信)이 있어이들을 도둑질하는 왜구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태종은 상선(商船)인지 적선(賊船)인지 분별한 다음 처치하라고 명하였는데,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왜인들이 도주하여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도둑질한 장물을 조선에 팔아 이익을 취하려고 한 약탈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흥리왜인을 가장한 왜구나, 흥리왜인 성격상, 상황이 바뀌면 왜구로 급변한 예는 적잖이 발견된다.

 

비인현 도두음곶 침구사건

141955일 새벽, 50척의 왜구선단이 갑자기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에 침입했다. 왜구들은 식량조달을 목적으로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일대로 향하여 가던 중 준비한 양식이 떨어져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본래 목적은 조선에서의 약탈이었다.

 

해주 연평곶 침구사건

1419513, 도두음곶 침구가 발생한지 불과 수일 후 왜구들은 다시 서해의 해주 연평곶을 기습했다. 왜구의 병선 38척은 안개와 어두움을 이용하여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사검과 만호 이덕생이 이끄는 조선의 병선 5척을 갑자기 포위하고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우리들은 조선을 목적으로 하여 온 것이 아니다. 중국으로 향하는 길이다. 단지 지금 양식이 다 떨어져 이곳에 이르게 되었으니, 양식만 준다면 곧 물러나겠다. 전일 도두음곶에서도 우리는 싸우려 했던 것이 아닌데 너희가 싸움을 걸어 할 수 없이 응전하였던 것이다.

 

왜구들은 자신들이 앞서 도두음곶을 침구한 왜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들의 요구대로 식량을 내놓지 않으면 다시 도두음곶에서와 같이 교전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쌀 5섬과 술 10병을 주며 물러가라고 하였으나, 왜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여 그 8배인 쌀 40섬을 더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쌀을 전하러 간 아군을 억류한 채 계속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의 행태는 흥리왜인의 성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의 이 같은 말은 사실일까? 그렇지가 않다. 중국 동남부로 항해해 가거나, 한반도 남서해안으로 오는 건 항해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원양항해에 나서며 양식을 싣지 않았을 리도 없다. 보급품의 탑재는 항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구는 애당초 조선을 침략할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출발 전에 약탈전까지 필요한 침구용 식량만 실고 한반도 해안에 들이 닥쳤다. 따라서 회항은 침구 목적이 이루어진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2차 대전시 출격용 연료만 실고 이륙한 가미가재 부대원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대전시 출격 가미가재 부대원들은 미함대로 돌진해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것 밖에 선택의 폭이 없었듯, 왜구는 침구 목적을 달성한 후에야 뱃머리를 돌렸다. 왜구 침구 방식이 근현대 들어 일본의 침략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의 이 같은 전술은 군사작전의 일환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왜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구의 만행이 이어지자 조선 정부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 대두되기에 이르러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로 구체화 된다. 이 같은 일본의 기만적인 태도는 1985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 20주년을 앞두고 일본 정부가 보여준 행태에서도 그대로 현재화되어 나타난다. 이날 일본은 한일 교린 관계를 상징하는 기념우표에 조선통신사 그림을 넣기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일동포 지문 날인에 거부하는 동포를 잇따라 연행하는 등 전에 없던 강경 자세를 취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기만전술은 현대 들어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어질 때마다 그대로 드러난다. 1982년 일본 문부성은 역사교과서 왜곡이 현실화되기 전까지 거짓으로 일관해 왔다. 오가와(小川) 문부장관은 “(한반도) ‘침략진출이라고 고쳐 쓴 것은 저작자 자신이다”, “일본의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민간이 발행한다며 시종일관 일본 정부의 간여를 부정한 채 민간에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일본 문부성은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87월 중학교 사회과목 교육 지침서인학습지도요령 해설서독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있다는 문장을 명시함으로써 기만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여 주었다.

 

2001년 역사교과서를 왜곡 사건시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와 일본 각료들이 마치 작전 계획의 일부인 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것도 이와 맥락이 같다. 이에 대해 한국을 비롯해 주변국들이 반발하자, 일본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화해 제스추어를 취하기도 하며 본질을 흐렸다. 정치적 목적을 이룬 뒤에 돌연 한일관계 복원을 시도하는 듯한 모습은 주변국을 한없이 우롱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고이즈미의 속셈이 간파되자, 한국은 물론 주변국들도 일본의 태도에 대해 일본 특유의 이중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었다. 그러나 이조차 일본은 결과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국면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했을 게 분명하다.

 

일본의 이 같은 기만적 태도는 한일 관계에서 극히 우려스러운 부분으로 국가간 신뢰의 근본마저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일본은 오랜 역사 동안 가해자 역할을 충실히 자임해 왔지만 어느 순간 마음만 먹으면 기해자 기억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치매내지 망각 증세를 심하게 앓고 있는 중증환자에 해당된다. 물론 일본의 이런 태도는 동아시아 안정과 평화에 가장 큰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자신의 성과라고 자부할지 모르나 이 같은 행태가 끝내 일본민의 불행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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