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1004 [창조의 CEO 세종] 활인 경영: 인정(仁政)의 본말(本末)을 다하라 우리는 의료제도 시행 상 여러 가지 이견이 발생해 한동안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었던 적이 있다. 의학 분업 찬반 논란ㆍ파업ㆍ진료거부 등으로 가장 고통을 받은 사람은 의료행위에 직ㆍ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세종시대와 견주어 본다면, 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은 세종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의 역사를 통 털어서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도 의원들은 피난을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고, 스스로 병원을 지켰다. 바로 그와 같은 의료 행위뿐만 아니라, 의원들의 도덕적 의무감은 세종의 ‘백성사랑’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나라 의학계의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일반 백성..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IT의 정수는 이런 것이다 조선은 농업이 필수적인 나라였다. 따라서 ‘농시(農時)’ 즉,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때를 안다는 것은 농사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데이터였다. 하지만 세종 전까지 우리나라는 자체적인 달력이 없어서 중국의 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또, 자주 국가라는 자존심 또한 말이 아니었다. 이런 인식하에 세종은 당의 선명력과 원의 수시력을 비교 연구해 가장 베스트 요소만을 취합해 우리의 달력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 달력인『칠정산 내ㆍ외편』은 나온다. 이는 비단, 농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과학과 IT 기술의 집합체는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 세종시대 모든 발명품ㆍ개발품에 그대로 녹아 흘렀다. 세종 시대 과학과 IT기술의 정수라고..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품질 경영의 모범을 만들라 활자뿐만 아니라, 출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종이다. 제지 능력과 기술은 출판에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세종은 서울에 조지소(造紙所) 를 두어 종이를 생산케 했다. 조지소란 지금으로 얘기하면 국영제지공장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주로 제지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공장에는 염색공이 8명, 종이 제조사가 81명 근무하고 있었다. 또 전국적으로도 종이 생산에 관여한 엔지니어는 그 무렵 787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법적으로 우대받고 생활이 보장되는 특권을 누렸다. 그만큼 조선의 종이 생산과 서적의 간행에 기울인 노력을 매우 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제지 강국 - 20세기 핀란드가 바로 이랬다. 그리하여 노키아(Nokia)라는 회사가 생겨났고, 그 후 이 회사는 세계적으로 유명..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 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세종은 효과적인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아웃소싱 했다. 그것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이슬람 세계의 문명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고려’도 세종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금쪽같은 아웃소싱의 대상이었다. 고려 때 세계 최초로 개발된 금속 활자는 조선에게 커다란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활자는 전임 CEO 인 태종 때부터 개발 프로젝트로 잡혀 있었다. 그 당시 태종은 지배층들의 강력한 반대 -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들은 남들이 지식으로 무장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들에겐 언제나 민중의 ‘지식’이 가장 강력한 위협 요소로 인식되는 것이다. - 를 물리치고 계미(癸未) 청동 활자를 주조하고자 했다. 태종도 13세기 고려에서 발명되어 겨우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청동 활자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하나의 성공은 다른 성공을 리드한다 [농업을 백업(back up)하는 기술을 개발하라 ] 세종시대에는 생산성 증대 정책과 더불어, 이를 강화해 주는 각종 개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이집트ㆍ그리이스ㆍ로마 시대로부터 축적된 과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핵심(core) 기술이었다. - 나일강의 삼각주를 측정하던 수학적 원리와 바로 그런 배경에서 개발된 다양한 기기들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시기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선에 건너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결코 그 자체로 적용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려 때부터 쌓아 온 우리의 자생적인 과학기술과 합쳐졌다. 다시 말해 한국 기술과 외국 기술이 합쳐지는 퓨전, 즉 기술 융합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준비된 우리의..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R&D만이 살 길이다 고려를 대신해 조선이 창업되게 된 배경에는 피폐한 국가 경제가 큰 몫을 차지했다. 고려는 토지 정책에 실패해 국민경제가 피폐해졌고, 농업 생산성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의 국가 경영층들은 나라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고려가 망한 이유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으로써는 창업 후 생산성 극대화 방안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실질적인 성과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 그리하여 태조는 먹고 입고 사는 소위 생활에의 문제와, 교육문제가 신생 조선이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조 이성계가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본(本)이며, 학교는 개화의 원(原)이다.(태조 4년 1.. 2009. 2. 3. 이전 1 ··· 143 144 145 146 147 148 149 ··· 16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