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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30년 묵은 기억

by 전경일 2020. 5. 29.

코로나 이후 생활상의 문제에 대응하기에도 버거워 다른 것은 돌볼 여지도 없는 내게 요 며칠은 불현 듯 나의 기억을 30여 년 전으로 되돌려 이끌어 간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92년, 나는 어찌어찌하여 종로 조계사 내에 있는 <불교신문>에 기자로 잠시 있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을 것이다.

 

신입기자인 내가 하는 일이란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기사랄 것도 없는 작문을 하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일을 하였다. 일도 배우고, 불교에 대해 배우는 견습 시기였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느 날, 내게 어떤 취재거리가 하나 떨어졌다. 송월주 스님 밑의 한 스님께서 지금 일제시대에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수소문 해 모아 보살피는 일을 하시려는데 그걸 취재해 보라는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정신대>라는 말은 처음 듣는 생소한 용어였고, 해방 이후 4, 50여 년간 국가는 물론 일반 대중의 관심도 전혀 없을 때였다. 누구도 그들 존재에 대해 관심 갖기는 커녕 정신대 할머니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취재를 위해 찾아자보니, 월주 스님 밑에 한 스님이 계셨고, 보살 분도 한 분 계셨는데 그 옆으로는 한 젊은 숙녀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하였다. 스님과 보살 간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무튼 어떤 억울한 사건을 호소하여도 조··동을 비롯한 국내 모든 언론사가 다루어 주지 않아 자신은 너무 억울해 <불교신문>에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뜻있는 일을 하시는 스님께 위로와 보탬이 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청정한 보살께서는 감사의 표시로 스님이 추진하시는 정신대 할머니들이 여생을 보내실 거처가 될 땅을 보시하시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게 바로 지금 경기도 광주군 퇴촌 면에 <나눔의 집>이 들어 서게 된 배경이다.

 

그 후로 나는 몇 번 더 그 일의 경과를 취대하는 일을 맡았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너무도 어두웠던 때라 기사화가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인연을 계기로 나는 스님과 함께 <나눔의 집> 기공식에도 갔고, 집이 다 지어진 다음에는 할머니들도 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처음 <정신대> 말을 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이십대 숙녀가 생각난다. 그 분은 같이 조계사 내에 있던 터라 그 후로 볼 기회가 더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체하거나 특별히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 분은 조계사 내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겨울이면 무척 추운 그 좁아터진 공간에서, 거의 무급의 급여를 받으며 헌신적으로 정신대 할머니 관련 일을 맡아 하기 시작했다. 기자인 나도 별로 관심 없던 때에 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최초의 NGO 활동을 한 것이다.

 

<나눔의 집>이 건립되기 전후로 그 분은 스님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일가친척이 없거나, 혹은 홀로 되셨거나, 생계가 너무 어려운 할머니들을 일일이 수소문해 모시게 하였던 기억난다. 하지만 할머니들 중에는 당신의 과거가 자식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끝내 나눔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신 분들도 있었다.

 

그 후 오래되지 않아 나는 유학길을 떠나고자 신문사를 그만두었고, 그 후로는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혀진 채 생활인으로서 나는 이십오 년을 넘게 살아 와 벌써 60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몇 해 전이던가. 내 나이 오십이 넘고도 서너 해 가량 흐른 해, 나는 그 무렵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일제강점기 때 징용 갔다 오신 일이 너무도 마음에 걸려 지난 1620년간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를 총정리한 <남왜공정>이란 책을 내게 되었다. 그 때쯤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모임을 별로 가지 않았지만, 그때는 동창들의 재촉으로 나가게 되었다.

 

오랜 벗들끼리 술 한잔하다보니 이런 저런 얘기가 흘러나왔고, 내 책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내가 내 책 이야기를 하자 앞에 앉아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듣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자기 아내가 <정대협> 활동을 하고 있다지 않은가! 해서 나는 오래전 <나눔의 집> 건립 이야기를 하였더니, 동창이 하는 말, 자기 아내가 윤미향 대표라는 거다.

? 그때 그 아가씨가 자네 부인이 됐다고? 어떻게? 언제?......”

 

세상은 참으로 좁다. 이런 인연이 있을 수도 있구나. 물론 나는 스물여덟 살에 그 숙녀 분을 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본적이 없다이게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워낙에 <불교신문>에 짧게 있었고, 그 후 나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살아왔으며, 외환위기 이후로는 늘 생활인으로 예전의 일은 떠올려 볼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또 한참 흘러  요즘 인터넷 어디를 봐도 나오는 그 인물 때문에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나라는 철부지도 숙연해질 만큼 숙연해 진터라 세상과 사물을 보는 슬기와 겸손함도 조금은 생긴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저녁마다 산책을 하면서 마음의 갈등을 했다. 이런 걸 쓸까 말까? 쓴 들 뭘 하겠는가? 내 밥벌이에나 더 신경 써야지. 더구나 코로나 아닌가…….

 

그러다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용기내서 살 거라. 겁먹지 마라. 한 인생이다.”

 

누구는 이런 조그마한 글 하나 쓰는데 뭐 이리 거창하게 나오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리고 깨닫는다. 시간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님을. 해서 나는 생각나는 바를 가림 없이 지금 내 책상에 앉아 적어 보는 것이다.

 

그 당시 <나눔의 집>을 짓고, 국가로부터 역사로부터 소외된 할머니들에 따스한 손길을 내민 분들이 없었더라면, 정신대 문제는 역사의 전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밥벌이나 할 때 누군가는 정말이지 평생 소중한 한 인생을 바쳐가며 세상에 헌신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평범 속의 위대함에 수그린다. 나도 한 몫 거들어야 했을 일에서 나는 벗어낫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무거운 역사의 소임으로, 양식있는 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묵묵해 수행해 오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NGO 활동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기업에서 경영을 하듯 모든 서류, 문서 등을 쫓아다니며 일일이 다 챙기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무래도 임의 조직이란 특성도 반영될 터다. 하지만 여하튼 이리저리 지적하고 있는 바도 있으니 차제에 밝혀야 할 것은 밝히고 바로 세우면 될 것 같다.

 

젊은 시절 잠시나마 <나눔의 집>이 건립되는 과정을 목도 하였고, 또 한일관계사가 나의 집안사와도 관련돼 <남왜공정>이란 책도 썼던 바가 있어 이번 사건에서 짚어야 할 다른 면을 한 두가지 조망해 볼까 한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발단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최근에 내가 먼저 생각하게 된 바다.

나는 이 사건의 시시비비를 밝히기 전에 쥐 잡듯 몰아대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는 보수 언론의 행태를 보며 한국 내 친일부역 세력은 여전히 강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구나 하는 확증을 다시금 할 수 있었다.

 

이 사태에서 얘기되는은 밝히면 되는 것이다. 수사기관은 이 때문에 있다. 그런데 왜 정대협 대표를 타깃 삼아 전체 정대협 활동과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민단체의 오랜 피나는 노력을 무야시키려 하는 것인가? 그러며 한일관계의 큰 축을 저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틀려고 하는 것인가? 나아가 교묘하게 시민들에게 정대협에 대한 불신의식을 심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사상 가장 큰 의미를 지닌 NGO인 정대협(NGO 대표)의 국회 진출이야말로 해방 이래 최초로 정신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치화로 나타난 것에 대한 극심한 거부 반응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문제에서 정신대 문제가 쟁점화 될 여지가 있으므로 보수 친일 언론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추종세력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흠집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실은 윤대표가 앞으로 조사 과정에서 혐의가 드러나느냐, 없느냐가 관심사가 아니다. 어떻게든 정대협을 흔들어 국민들로부터 이반시키고 이간질시키려는 게 목적이다. 이게 바로 핵심인 것이다. 그러면 정치력은 발휘하기 어려울 거고, 정신대 문제는 박근혜 정부 시기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 이다. 이 점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용수 할머니는? 이 할머니는 일부 언론에서 애기하듯 피해자 중심의 운동에서 소외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할머니로서는 당연히 반발도 하신 거라 본다. 따라서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할머니들의 뜻을 더욱 더 반영하는 일을 정부와 정대협 등 NGO는 하여야 한다.

정부만 말하자면, 정부는 그간 역사, 사회문제에 관한 한 민간단체에 모든 궂을 일을 내맡기는 걸 일로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차제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야 한다.

 

이런 것들 이외에 나의 개인적 소회가 반영된 주장도 있다. 나도 노령의 어머니가 계신 까닭에 하는 말이지만, 사람에 따라 나이가 들면 노여움도 커지고 섭섭함도 커지기도 하는 법이니 노인들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분들은 역사적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녀린 한 개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거라 본다. 역사를 고발하는 운동은 하되, 개인적 위로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할머니라면 함께 하시던 할머니들이 나날이 떠나시는 것을 볼 때 인간적 두려움도 일 테니까.

 

얘기가 길어졌다. 지금 나의 기억은 삼년 년을 내리 달려온 느낌이다. 밥이나 먹고 사는 범부로 살아왔으나, 나대신 그 누군가 일생을 바쳐 수행한, 그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쉽게 짓밟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왜소하지만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아서 적어 보았다.

 

그런데 보아하니 윤대표가 검찰에 가서 무죄로 판명된다한들 언론에서 반성하고 자숙할 사람을 찾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촛불, 코로나 국면 등에서 보여준 높은 시민 의식보다 저들은 한참이나 밑에 있으니까. 애초에 짓고 까불고 흠집 내며 저들끼리 어둠 속에서 낄낄대는 게 저들의 목적이었을 테니까. 그러면 클릭도 많이 생길 테고, 저들이 추종하는 세력에 재롱을 떤 효과도 충분히 드러낸 셈일 테니까.

 

그러니 성숙한 시민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가장 인간적으로, 역사에 대해서는 추상(秋霜)과도 같이, 여하한 수단으로든 시민 단체의 활동을 끌어 내리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서는 용기를 더해줘야 할 때이다.

 

-전경일. 작가.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