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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요약 좀 해 봐

by 전경일 2010. 3. 30.

후배 중에 그림 꽤나 그리는 녀석이 있다. 이른 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쓱쓱 연필을 몇 번만 움직여도 그림 한 장은 거든히 그려댔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나를 그려보라고 했다. 녀석은 멀뚱하게 눈을 뜨더니 손사래를 쳤다.

“형, 나 그런 거 잘 못해요.”

나는 피식 웃으며 재차 요청을 했다.

“나를 좀 요약해 보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캐리커천가 뭔가 하는. 술 한잔 산대두.”

후배에게 예술작품으로 그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림 하나를 얻었다. 거기다가 내 나름대로 제목 하나 달아봤다.

 

<나의 summary>

후배 왈, 내 얼굴을 요약하면 이렇다나. 안경을 꼈고, 코가 크며, 머리는 쭈뼛쭈뼛하다. 내 머리카락은 너무 굵다 등등. 아무튼, 나는 이 캐리커처를 종종 보게 된다.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인데, 그때 나는 왜 후배에게 내 얼굴의 그림을 요청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 무렵 나는 생각이나, 생활이나 모든 게 헝클어져 있었었다. 은행 잔고는 바닥나 있었고, 몇 달 째 실직상태였으며, 쥐고 있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거덜난 인생이었다. 그 무렵,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정점을 이뤘다. 그러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게 피폐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이어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욕망이 그런 요구를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후배에게 요청한 ‘나의 요약본’도 그런 내 상태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땐 그랬다.

그 후, 나는 용케도 복잡하고 뒤엉킨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마 나를 요약해 봄으로써 구질구질한 잔가지는 다 쳐내고 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건 삶을 단순화시키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느끼는 감정과 상태는 사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은 단순히 늘어 뜨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만일 이런 것을 간단히 모아 보라면 인생을 대하는 방법은 훨씬 더 간결하고 정밀해 질 것이다. 가치 있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집중 대상이 될 것이다. 사랑, 우정, 믿음, 도움, 희망, 의리, 노력, 땀, 웃음, 가족, 껴안음, 입맞춤, 탄생, 슬픔, 죽음... 이 모든 가슴 벅찬 감정 앞에서 가장 간결하게 힘이 되는 부분은 키우고,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요약해 내는 단순 명료한 가치만 남는다. 그걸 알게 되었다.

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늘 눈이 가린 얼굴 때문에 생각해 보게 된다. 단순히 안경알 때문에 이렇게 그리게 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가? 내 삶엔 화룡점정의 마무리가 없다는 뜻일까? 요즘에도 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내 삶을 간결하게 하려고 몸부림치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긴 했나? 그림 속 나는 여전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적지 않은 질문이 계속 떠오른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