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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큰 나라 고구려: 고구려인들과 글로벌 리더십

by 전경일 2010. 4. 3.

제국적 국토영역은 고구려로 하여금 여러 부족이 연합한 국가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창업 이래 지속적인 확장의 결과였다. 고구려에는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탁노부(濁奴部)·계루부(桂婁部)의 다섯 부족이 있었다. 평양으로 천도하고 부터는 혈연적인 오족제도(五族制度)에 지연적인 요소를 가미해 오부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구려 사회는 대체적으로 혈연적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했다.

부족제도에서 통치자는 부족들의 선거에 의해 결정되었다. 3세기 말엽 기록에는 처음에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뒤에 차츰 약해져서 계루부에서 대신 왕이 나왔다고 전한다. 또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서진정책을 펼쳐 요동(遼東)·현토군(玄菟郡)을 서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태조 때에 와서 고구려 영토는 크게 확대되었고, 나라의 터전이 한층 튼튼해 졌다. 그 후로 역대의 왕들도 서진정책을 이어 받아 끈기 있게 요동지방을 공략한다. 요동의 확보와 함께 고구려는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고, 나아가 글로벌 경영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대표적 국가이다. 만주일대와 한반도 중부이북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동서남북으로 광범위한 영토를 보유하면서 해양까지 세력이 뻗쳐 동북아의 주역으로 700여 년 이상 존속했다. 건국하자마자 주변국들을 병합했는데, 이전에 멸망한 고조선을 계승하고, 영토를 회복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고토 회복을 뜻하는 ‘다물(多勿)’은 그들의 DNA에 새겨진 미션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고조선의 계승자라고 믿었다.

고구려는 한족세력 및 북방 유목 종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대하고 한편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게 된다. 여기에는 독특한 지정학적 환경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이런 요소는 주변 종족들을 아우른 세계 국가적 면모를 갖게 만든다. 원래 그들의 기상이 크고 높아 세계제국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세계제국이 되어 그들의 이상이 높아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호간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확장될 가능성을 지닌 민족으로써, 제국이 확장되면서 더 큰 민족정기의 웅비를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5세기경에 광개토태왕이란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 최대의 영토를 확대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쌓게 된다. 태왕은 동서남북 전방위 공략 정책을 취하여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지역, 요동반도,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대한다. 나아가 해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해 및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일본열도에까지 뻗쳤다.

특히 태왕은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전통적인 육지 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동서남북의 전방위 군사공략 정책을 구사해 동아시아 각국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한반도가 남(南)은 해양세력 일변도의, 북(北)은 대륙세력 일변도의 편향된 시야를 확보해 온 지금까지의 사례와 사뭇 다르다.

동서남북을 통해 사방팔방을 응시하며 대륙과 해양을 교차하는 거대한 네트웍크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략 그 영토가 만주(동북 3성 80만㎢)의 3분의 1과 한반도(22만㎢)의 3분의 2를 합친 40만㎢가 넘는 크기에 70만호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를 보면 고구려성이 바이칼 호 근방에서 발견되는 등 대제국 고구려의 영토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아직 더욱 면밀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 태왕이 이뤄낸 성과는 동북아의 한 국가에 불과했던 고구려를 혁신해 제국다운 면모로 일신시킨데 있다. 이는 태왕이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추모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전경일, <평범한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