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TV사극에 변치 않는 시각이 있다.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면 하는 일도 엄청나게 많았을 터. 하지만 정작 우리 사극의 주인공들을 보면 대부분 여자 문제, 당쟁 문제 따위로 골머리 썩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비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한나라 국왕이 하는 일을 한참 얕잡아 보아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런 사극을 보며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갖게 될 역사관, 인물관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자못 걱정이 앞선다. 이런 상태에선 우리 역사는 물론 한 시대를 경영했던 우리 역사속의 제왕들에 대한 자부심도 눈꼽만치도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극이 사료를 기초로 한 것이니 아예 근거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문제는 그게 전부인 양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극대로라면 한마디로 왕은 무능하고 퇴폐하기만 한 CEO 모습 그대로다. 룸 싸롱이나 전전하고 맨날 집안싸움만 하고, 치정 문제에만 얽혀 있는 식. 과연 그런 접근이 올바를까?
그런 분들께 나는 감히 세종대왕을 드라마로 리라이팅(re-writing)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한마디 충고도 잊지 않고 싶다. 이제 좀 일하는 CEO, 밤새워 뭔가 창조해 내고, 국가 경영을 고민하는 CEO상을 한번 그려 보자고. 그게 우리 역사상 국왕들의 역할을 정말 제위치로 돌려 놓는 게 아니겠냐고.
더구나 사극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한사코 임금을 쥐고 흔드는 요녀들로 묘사된다. 하지만 과연 임금이 그렇게 쉽게 정분에만 뒤얽혀 헤어 나오지 못했을까? 또 당대의 여성상이 그렇게 비치는 것이 옳기만 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종대왕은 휴먼 터치의 경영자였다. 그의 애민사상이 바로 그것을 밑받침해 준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군주였으나, 결코 원칙 없이 친밀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더구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한 맘마 보이 스타일의 군주는 더욱 아니었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과 분별심이 있었던 것. 충분히 절제된 자기 관리 능력을 지닌 CEO였다.
예컨대, 자신의 총애를 받던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자신의 오라비를 승진시켜 달라고 인사 청탁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틀림없이 남녀간의 정이 샘솟는 베개 옆에서 이런 청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그런 궁녀를 바로 그 다음날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렸던 것이다.
왜그랬을까? 사랑을 무기로 인사 문제에 관여하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것을 빌미로 자신의 인사 원칙을 무너뜨린다면, 종국에 가선 그녀가 어떤 일에까지 끼어들지 크게 염려됐다고 세종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세종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공인다운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TV 드라마 속의 국왕들은 하나같이 매일 매일 남녀 문제로 고민하는 얼빠진 인간들로 묘사되고 있으니... 이는 단순히 시청률 때문만은 아닐 듯싶다.
자라면서 그렇게 배워 온 부실한 역사 의식의 근저에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을 터. 그러나 이런 시각이 여전히 뿌리채 뽑혀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래서인가?
그러니 여러분들도 TV 사극을 볼 때면 잊지 말기를 바란다. 후세는 이 시대를 어떤 사극으로 꾸미게 될지 말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