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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남왜공정] 왜(倭)의 재침은 없는가?

by 전경일 2012. 1. 18.

머리말_왜(倭)의 재침은 없는가? 

미쓰비시의 탄광이 있었던 규슈 나가사키 인근 하시마(端島).  이곳에서 식민지 시기 100여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혹사당해 사망했다.(출처: 서울경제 DB) 나의 부친이 징용을 간 사세오마지 대지자 탄광을 나는 아직도 가보지 못했다. 19 세 나이의 아버지의 청춘을 이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열아 홉 살 나이에 징용에 끌려가 일본 사세호현 사세오마찌 대지자 탄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학교를 다니던 어린 나이, 함춘 나루터에 낚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면 노무동원 담당자 가와무라를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너 몇 살이야?”고 묻고는 횡 하니 자전거를 타고 사라져 버려 여간 꺼림직스럽지 않았는데, 3일 후 불쑥 징용장이 나왔다.

징용에 끌려가던 날 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인 이들은 가족들과 뒤엉키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아버지는 노무담당자의 점검을 받고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선서 제창을 강요받은 다음 노무담당자와 일본인 순사의 인솔 하에 콩나물시루 같은 트럭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살아 생전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정황을 기록해 두셨는데 일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가족과 헤어질 때 가족들의 울음과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는 억머구리 끓듯 하는 울부짖음을 뒤로하며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에 탄 그들 중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고향을 등 뒤로하고 춘천에 도착하여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하니 일본인 현지 노무감독이 인원을 점검해 우리 일행을 인수했다. 먼동이 틀 무렵 부산에 도착하여 오후 4시경까지 감금상태로 엄중 감시 하에 갇혀 있다가 5시경 관부연락선에 타니 각처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수 천 명을 헤아릴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끌려가는지 제각기 인솔자가 있었으며 부두 곳곳에는 일본 현병이 서슬 싯퍼렇케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배는 잠수함공격이나 수중지뢰를 피하기 위해 갈지(之)자로 운항했으며 무한정 넓은 바다를 향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새벽 3시에 일본 하카타(博多)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福岡)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기차를 바꿔 타고 오전 10시경 목적지인 사세호현 사세오마찌 대지자 탄광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읍내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해변가 탄광 촌락으로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3일간 훈련을 받고 바다 속 30리 막장에 들어가 보니 이곳이 바로 강제노동 노역소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발랑 벌어진 접시에다 바다풀을 섞은 밥이나 다시마국 등을 주는데 그 양이 너무나도 적었다. 밤일을 하고 한숨 자고는 오후 바닷가 방초 둑에 앉아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건너 바다 끝에는 우리 조선 땅 일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 전쟁이 끝나야 저 바다를 건너 그리운 부모형제 집으로 갈지 한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보기 여러 번이었다.”

우리 가족 중 징용을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오신 분은 부친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앞서 조부께서는 첫 징용 대상자로 남양군도에 끌려갔다가 운 좋게 살아 오셨다. 생전에 아버지는 그 남양군도가 지금의 사이판이라고 말씀 하시곤 했는데, 나는 휴가 차 가족들을 데리고 괌에 놀러갔을 때 홀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조부가 징용을 갔던 그 섬을 꼭 방문해 보리라고 작심하곤 했다.

가족사를 듣고 자란 나는 어렸을 때에는 부친의 그런 이야기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며 한국사의 본령을 알게 되고, 일본의 침략사와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움이 역사의 저 장막 뒤에서만 전개된 과거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벌어지는 숨 가쁜 역사가 거기 있었다. 밥을 먹어 먹이는 식구가 생겨나고, 삶의 바쁨이 내 등 뒤를 밀게 하면서 나는 그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가 생각난 것은 아마 내가 한․일관계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던 3, 4년경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 삶에 깊게 드리워진 그 ‘잃어버린 청춘’에 크게 공감한 것은 부자지간의 정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격은 악성 종근(種根)과 같은 역사의 뿌리가 지금 일본의 극우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역사의 모든 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뇌리에 박힌 고난사로 남아 있는 고통의 진앙지가 어딘지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뿌리의 근원을 찾아 더욱 세게 붙들고 끝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오늘날 일본의 침략성이 일제의 군국주의에 기초하고, 한․일합방과 임진왜란, 그리고 근 1620년간 이어진 900여회에 달하는 한반도 침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서만 시간순으로 바꿔 돌리면 역사이자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가 되었다. 나는 그 뿌리에 침략의 원흉이자, 악의 근원인 ‘왜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한․일관계사를 관통하는 ‘왜구 침구’의 약탈·살인·피로(被虜)의 연결고리가 끝내 일제 치하 우리 가족사에까지 이어져 조부와 부친의 강제징용으로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한국사의 깊은 굴곡을 헤쳐 나가며,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절박함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보면 아버지가 징용을 끌려간 후쿠오까 일대도 오랜 시간 왜구의 활동 거점인 일본의 서남해 지역이었다. 또한 한․일 관계사의 창구 역할과 한반도 침략의 최선전으로 일본 지휘본부가 있던 다자이후(太宰府) 인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구와 일본 침구를 통해 한․일관계사이자, 일본의 채침을 우려하는 나의 연구는 이로써 보다 체감 있게 다가왔다. 민족의 성원으로 일본의 독도 침구,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 등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 긴요하고 절박한 역사 연구와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예비서(豫備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을 묶어 내는데, 근 7년간 자료를 찾아 뛰어 다녔고, 역사를 통찰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과거사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사의 골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뼈저린 각성은 글을 쓰는 동안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내게 엄습했다. 마치 일제치하 운명적으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오신 나의 조부와 부친의 근영(謹影)이 이 책을 쓰는 동안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었듯이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 분들은 민초로서 망국(亡國)의 설움을 알고 징용되는 굴곡된 역사의 삶을 대가없이 살다 가셨다. 나는 혈육의 고통을 민족사의 한 줄기에서 읽게 된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해 온 ‘왜구’의 존재를 앎으로써 우리 민족의 존립 근거를 보다 튼튼히 하고, 적을 앎으로써 나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 졌다. 역사를 아는 민족만이 생존과 웅비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역사를 모르고서 한낱 작은 이해에 급급하다면 생존을 위한 조건은 물론 그 기반조차 임진왜란 때나 구한말처럼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다.

일본의 재침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이 책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 성원에게 민족의 존립과 영속성의 전제조건을 새롭게 톱아 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자아를 아는 통찰력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우리의 생존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일본의 숫한 침구를 받아왔지만 끝내 버티고 이겨온 승리의 역사를 통해 더 큰 차원의 힘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보다 깊이 있는 역사 성찰의 자세일 것이다.

왜구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가운데서도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민족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노력해 온 학자 제위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 분들이 앞서 밝힌 등촉(燈燭)은 이 책의 집필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고, 곳곳에 훌륭한 주석으로 인용되었음을 밝혀 둔다. 이 책 ⟪남왜공정: 일본 신(新)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는 현시대 한중일 각국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바이자, 지금도 겪고 있는 첨예한 문제를 구체적 사료에 근거해 풀어내고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사 및 세계사에 적지 않은 영향과 방향타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또한 우리의 현대사는 물론 동아시아 미래사의 방향 설정에도 도움을 줄 안다. 물론 대왜(對倭)대응 면에서 발화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 책을 통해 이 민족이 냉철한 이성과 각성을 높이고 실천적 노력을 견실하게 이루어내길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왜구’에 의해 찢기고 갈린 우리 국토와 한국사, 여전히 분단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헌정(獻呈)하고자 한다. 응당 우리 ‘국토의 막내’ 독도에게 보내는 영토 수호의 굳건한 메시지라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싶다. 고백하건대, 오늘 나의 이 같은 헌정은 이 민족에 대한 ‘징비(懲毖)’의 차원이 크다.


2011년 12월

전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