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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부모코칭 |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마음] 가끔씩은 천천히 가는 거지 뭐

by 전경일 2012. 2. 2.

“농촌 생활은 좀 어떠냐?”

“시골이라서 바뀔 것도 없지, 뭐. 후후...”

오랫동안 못 만난 대학친구를 동창 어머님 팔순 잔치에서 만났다. 근처 다방으로 몰려간 친구들은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얘기에 여념 없었고, 나는 말없이 기대앉은 시골친구를 바라봤다.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강렬하다. 작은 키에 다부진 팔뚝을 걷어 부치고 늘 저돌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이미지로 내게 남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학을 떠난 지 이 십여 년만의 일이었고, 삶과의 싸움에 화염처럼 그을린 얼굴들이 거기에 놓여 있었다. 이마엔 영락없이 시간이 든 회초리 흔적이 선명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만남이 가져오는 짧은 순간의 어색함이란... 겸연쩍어 비싯 웃음이 났다.

궁색한 시골 살림살이는 외모에 그대로 배어나왔지만, 그는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당당하기 조차 했다. 겉으로만 그런지 궁금증이 일어 짐짓 그의 속이 얼마나 깊은지 꾹, 찔러 보았다.

“너는 아직도 꿈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니냐?”

“꿈이라... 그러냐? 나는 다만 내 자신을 잃지 않고 살 뿐이다...”

시골에서 이장을 하며 살고 있다는 친구.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달랐고, 사는 방식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왠지 그의 삶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에게선 나와 달리 내가 잊어버린 꿈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아마도 - 삶에 대한 뜨거움 같은 것일 게다. 우리는 몇 마디 화두를 던지다가, 늦은 시간 그는 시골로 내려가는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언제든 사는 게 답답하거든 머리 한번 식히러 내려와라.”

나는 그러 마, 하고는 그를 보냈다. 그에게서 나는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일까?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뒤쳐져 있었고, 내가 회사에서 겪는 치열한 경쟁 따윈 알 턱도 없었다. 느려터진 시계를 꿰차고 있는 촌부의 이미지랄까... 반면, 나의 처지는 다르다. 세상의 속도계에 맞춰 째깍째깍 움직여야하고, 바삐 뛰어야 먹고 산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며, 등짝이 시리기만 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유란, 핑계라고 할지라도 유리하게 하고 싶을 땐 수도 없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와 마주한 자리에서 내가 그랬다. 그런데도 그가 훨씬 더 커 보였다. 여전히 처음 그대로 있는 친구, 초심을 간직한 친구, 누가 그를 미련한 곰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지치기가 이루어진 가로수를 올려 보았다. 상금머리를 한 나무들은 겨울 동안엔 솟대처럼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아야만 한다. 내 삶이 저렇듯 을시년스러울 것 아닌가. 거두어 들였으나, 장례 쌀을 빌어다 먹은 듯한 찝찝함... 늘 돌려막기식 삶이 가져오는 다급함...

그간 나는 무엇을 해 왔는가,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무엇에 매달려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가? 나는 그가 보내 온 문자를 열어본다.

“꼭 오렴.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중요하지. 경쟁 없는 곳도 살만하다...”

전경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