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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경영의 구원투수, 창조적 다양성

by 전경일 2012. 5. 8.

창조의 조건은 무엇인가? 많은 전제 조건이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페르케(왜why)'를 늘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적 기저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깊게 파고 파서 그 끝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의문을 품고 해법을 찾는 것이다. 자신이 늘 보던 것, 생각하던 것,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라가면 폭넓은 사고를 하기란 어렵다. 물론 창의적인 결과를 얻기도 힘들다. 기존 사고에 꽉 끼인 상태가 되면 진퇴가 불가능한 상황에 맞딱뜨리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호가 처한 상황이 이렇다. 진퇴가 가로막힌 모방의 덫, 외통수의 사고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이 협곡을 지나는 것은 적잖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넘기만 하면 새로운 평원이 펼쳐진다.

 

21세기 들어 기업에서 찾는 인재상이 급변하는 것은 현재의 방식으로는 기업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해결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절박감이 목까지 차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방식, 즉 하나의 생산기술이 도입되고 산업화 시대처럼 그 효용성이 적어도 100년은 유지되는 기반이 된다면 이런 고민은 덜할 것이다. 하지만 초당 테라바이트의 정보가 오가고, 기술 혁신이 일 단위, 분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시대에는 과거의 방식은 맥을 못 춘다. 지식이 융합하며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는 만화경의 시대에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셈이다. 지금은 창조 조직으로 혁신시켜 새로운 차원의 사업기반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 존립 기반 자체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현재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혁신의 몸부림으로서 창조는 부상하는 셈이다.

 

창조적 역량은 기업의 미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생존조건으로 다가오고 있다. 창의적 조직은 꽉 막힌 한증막 같은 현실을 벗어나 숨통이 확 트이게 만들 수 있다. 왜 바다의 표면은 보면서 물결이 만들어 내는 심연의 지형은 꿰뚫어 보지 못하는가? 그건 표면적이고 외형적인 이해 수준에 우리 인식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는 산업 사회의 덕목인 일사불란, 절도, 명령복종과 같은 인간의 다양성을 얽어매는 제한된 경영 이데올로기(대부분은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였지만)에 의해 개인과 조직의 창조적 사고와 행동이 크게 제약을 받아왔다. 그러나 전 세계 그 어느 시대의 융성도 획일화된 가치와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경우란 없다. 상호교류, 교감, 교차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혁신의 결과를 가져온다. 《훈민정음》의 창제 철학의 하나도 다원성, 차별성을 인정하는데서 나타난다. 해례(解例)의 “각각 그 처해 있는 바에 따라 평안하게 할 것이요, 억지로 똑같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역의 ‘개물성무(開物成務, 사물을 열어 일을 성사케 한다는 뜻.)’의 정신은 열린 지적풍토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세종시대의 르네상스는 전 지구적이며 통사적(通史的)인 지적교류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세종시대는 세계사에 있어서 강력한 문명의 교류가 일어났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개념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ㆍ이슬람ㆍ로마ㆍ그리스 문화권과 직ㆍ간접적인 문화교류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이슬람 교도가 있을 정도였다. 1427년(세종 9년)4월 4일 세종은 회회교도(回回敎徒 이슬람교도)들도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는 명령을 대조회에서 내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슬람 경전을 암송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지녔던 그리스 , 로마, 나아가 이집트의 천문, 역법 및 질학(質學) 등 장구한 과학적 전통은 원대(元代)의 과학기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이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세종의 각별한 관심이 이슬람과의 접촉에서 읽혀진다.

 

그 당시 거대한 문명은 세종의 개방 정책에 힘입어 속속들이 조선으로 넘어 오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협소하게 보자면 천문학을 중심으로)에 대한 세종의 갈망에서 나왔다. 개방과 상호 교류의 결과 이러한 문명의 창조적 유산은 조선의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조선 사회의 수구(守舊)로의 이동은 우리가 이슬람 세계와 1970년대 중동 개발 붐이 일기 전 까지 단절되는 역사적 분절 경험을 겪게 한다.

 

수구(守舊)와 구태(舊態)의 본질은 그 자체 변화를 주창하더라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의 시도이기 때문에 정작 변화의 주체를 바꾸지 못하고, 그 결과 변혁은 힘을 얻기 어렵다. 최소한의 다양성마저 압살해 버린다. 창조적 조직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생각과 스타일, 경험이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은 확장된다. 나아가 자신의 분야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응용력도 높아진다. 개방성은 그만큼 창조와 직결된다.

 

르네상스 전성기인 15세기 피렌체나 베니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경쟁력에 있어서 프랑스나 터키를 완전히 압도했다. 심지어는 봉건 영주들의 수도원과 비교해 생산성이 40배나 높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의 하나로 교역을 꼽고 있다. 그는 “교역은 이질적인 분자와 교류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질 분자와 교류하면, 순수 배양될 때에는 없었던 자극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개방적 교류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토양이었다는 얘기다.

 

요즘엔 기업 내 팀을 구성해도 과거처럼 동일한 스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주요 조건으로 추가하고 있다. 타분야와의 연계를 통해 지식과 경험이 상승작용하는데 착안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통섭적 역량을 갖춘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부족하다면 다른 전문가들을 묶어 팀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큰 복합시너지를 낸다. 대표적인 예로 소니(Sony)의 경우에는 디자인 센터 내 기술자,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뉴트랜드 제품’이라는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과거 삼성전자의 ‘싱크탱크’도 이와 같은 목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이질적 구성원을 통합해 낼 때 과거에는 상상치도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개인별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조직의 활력을 찾는 것은 창조에로 활로를 찾고 있지 못한 많은 기업에게 구원투수가 되고 있다.

 

다양성과 관련되어 위너(Wiener)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스턴트 맨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은 “비행기로 농약을 살포하는 일을 했던 사람에서 로데오 선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다양하고 색다른 전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스턴트 맨이 빌딩에서 떨어지는 연기에서부터 차에 치이는 연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스턴트를 연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다양한 일을 통해 쌓은 복합적 경험이 어떤 일의 주요부분을 소화해 낼 수 있다. 이 같은 생각은 특정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나 일반지식, 경험을 보유한 제너럴리스트들의 조건과 많은 점에서 상이하다. 다양한 인적 자본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런 조직은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전략적 역량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경험이 있고, 대처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구비되어 있을 때의 기업의 힘은 궁극적인 경쟁력과 맞닿아 있다. 창조적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태양의 서커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인재들을 통해 가장 적절한 인적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다. ‘서커스를 재발명(Reinvent the Circus)'해 낸 사람들의 면면은 클래식 콘서트, 뮤지컬, 연극, 체조경기, 발레, 패션쇼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이 기존 서커스에 늘 등장하던 동물 묘기를 과감히 없애 버리고 라이브 음악과 현대무용식 안무를 도입해 세련미와 예술성을 더한 ‘아트 서커스’로 발전시킨 원인이었다. 재미와 스릴을 살리면서도 연극처럼 스토리를 가진 공연,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예술적인 주제가와 음악이 가미된 지적 세련미와 풍부한 예술성이 서커스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서커스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낸 이 집단은 지난해 800만명을 포함 지금까지 전세계 100여 개 국에서 5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으며, 최근 5년간의 연매출 성장률만 해도 15%가 넘는다.

 

창립자인 기 랄리베르테는 직원들이 정장에 넥타이 차림을 하고 출근하면 가차 없이 가위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넥타이처럼 정형화된 복장에서 어떻게 창조적 사고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집무실 한 켠에는 잘려나간 넥타이가 수북히 쌓여 있는데, 이 또한 쇼잉(showing)이긴 하지만 창발성을 강조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창조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퓨전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이를 수용하는 것은 정확히 글로벌 상식에 따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시대는 급변이 가져오는 혼란속에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전환기이다. 혼란은 창조를 낳는다. 마치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올슨 웰스(Orson Welles)의 대사처럼 기화가 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보르자(Borgias) 치정하의 30년 동안 악이 판치는 격동의 세계였지만, 위대한 르네상스 문화를 창출했다. 깨끗하고 평온한 스위스에서는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탄생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뻐꾸기 시계만을 창조했을 뿐이다.”

 

뻐꾸기 시계가 아닌, 창조의 근원을 이뤄내는 것은 혼란기 경영자들의 과제로 주어져 있다. 창조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퓨전형 문화에서 나오고, 이런 문화는 다양성을 내재한 인재들을 끌어 모은다. 개방이 다문화 인재의 참여를 가져오고, 둘의 통합이 혁신적 경영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21세기 인재상은 복합문화적 요소를 스스로의 DNA에 내장시키고 있다. 각기 다른 경험과 문화를 묶으면 과거에는 감히 상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이 잉태된다. 하물며 문화를 통섭을 해 내는 인재라면 창조 깊이와 폭은 훨씬 더해 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업에는 어떤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는가? 경영자들은 묻고 있는가? ‘왜’ 그런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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