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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고구마 초발혁신가 조엄: 통찰이 빚어낸 놀라운 결과

by 전경일 2012. 8. 9.

통찰이 빚어낸 놀라운 결과

 

이 글에서 다루려는 한 인물에 대해 짤막한 평을 달자면, 아마도 이런 수식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전래해 온 사나이.

· 위대한 사고와 행동으로 조선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했던 목민관.

· 고구마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성과를 관리한 경영자.

· 시대의 주요 모순을 직시하고 해법을 찾고자 고군분투한 경세가.

· 문익점의 ‘입을거리’ 혁명을 벤치마킹해 ‘먹거리’ 혁명을 이뤄 낸 식(食)문화의 초발혁신가.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조선 후기 문신 영호(永湖) 조엄(趙曮)이다.

 

이 같은 수식어가 붙어도 부족하지 않을 조엄은 과연 누구일까? 조엄을 알려면 우선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조엄은 조선후기 권문세가인 풍양 조씨 사람으로 당대 최고의 기득권층 인사였다. 그의 집안은 당대 핵심가문으로 안동 김씨와 함께 19세기 세도정치에 깊숙이 관여했고, 특히 그의 본관인 풍양 조씨 한평군파(漢平君派)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 조선 국정의 모든 인사권을 움켜쥐고 있던 세도가였다.

 

그 시기 풍양 조씨는 한 집안이자, 하나의 확고한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국가 인사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입지를 공고히 다져왔다. 세도에 깊이 관여한 이조판서에 이 집안사람들이 다수 임용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엄을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 때부터 7대에 걸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모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행정안전부 장관급에 해당되는데, 조상경-조엄-조진관-조만영-조병구-조성하-조동면이 이들이다. 이처럼 풍양 조씨는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권부의 핵심에서 조선정치를 쥐락펴락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조엄이 먹거리를 걱정할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의 굶주린 참상을 보며 조선에 고구마를 도입해 온다.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사행 전 경력

조엄의 벼슬 초행길은 집안 덕택이 컸다. 당대 명문가 출신이라는 집안 배경으로 음보(蔭補)로 내시교관이 된다. 그러다가 1738년에 식년생원시에 합격하고, 1752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한다. 그의 과거 성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생원시] 영조(英祖) 14년(17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64위(100명중

94명 합격)

[문 과] 영조(英祖) 28년(1752) 임신(壬申) 정시(庭試) 을과(乙科) 2위(25중 3명 합격)

 

성적은 보통 수준이다. 과거에 합격한 조엄은 1749년 익위사(翊衛司) 시직(侍直)이 되었다가, 4년 뒤인 1753년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고, 이어 수찬・지평・홍문관 교리를 역임하게 된다. 그 뒤 동래부사를 거쳐 1758년에는 경상도관찰사에 임용된다.

 

지방의 관리가 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백성과 만난다는 뜻이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로서 그는 산적한 현안 문제에 골몰한다. 그가 만난 백성들은 하나같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찰사 재임 시인 1760년 2월, 조엄은 경상도 내 사노비 1만여 명의 노비 공역을 감면시켜 주어 민생의 불안・불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다. 또 한전(旱田)에 감세 비율을 적용하여 전세(田稅) 부담을 줄여 주었다. 1762년에는 비변사 당상으로 영남 곡식 5천석과 호남 곡식 3천석을 나누어주고 구획하여 조적(糶糴, 환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이는 일)을 보충한다. 현업 재직 시부터 현장의 목소리에 세심히 귀를 기울인 그의 목민관적 기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엄의 관직 생활에서 일대 변화가 찾아온 것은 1763년이었다. 그 해 7월 13일 조정으로부터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총책임자인 정사(正使)로 임명된 것이다. 정사로 선정된 데에는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왜관을 중심으로 대마번과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대일문제에서 상당한 실무경험을 쌓은 점이 크게 작용했다.

 

어수선한 정국에서 조엄이 통신사 정사로 결정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기복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원래 1762년 8월까지는 정사(正使) 서명응, 부사(副使) 엄린, 종사관(從士官) 이득배로 삼사(三使)가 임명되어 있었다. 그러다 이듬해 7월 이인배를 부사로, 홍낙인을 종사관으로 전격 교체한다. 그 뒤 정사 서명응이 이조참의로 승진하게 되지만, 이조참판 조명채를 배척한 죄로 종성에 유배된다. 조명채는 1748년에 파견된 제10차 통신사의 종사관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러자 정사는 다시 정상순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정사 정상순이 아픈 노모 때문에 일본에 갈 수 없다고 거부하자 다시 인선에 들어간다. 이에 영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명을 받은 사람이 모두 약삭빠르게 피하고 있으니 정상순을 죄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스스로 애써 노력하거나 힘쓰게 할 수 없다!

 

왕의 노여움을 받아 그는 김해로 유배를 갔다. 일벌백계하겠다는 엄명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정사는 조엄, 부사는 이인배, 종사관은 김상익으로 다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종사관은 원래 홍낙인이었으나, 그가 조엄과 친혐(親嫌)이 있다는 이유로 조엄과 같은 노론 출신의 김상익으로 교체된 것이다.

 

조엄의 제11차 통신사행은 계미년(1763년)에 파견되었다고 해서 계미통신사절로 불리는데, 그 구성은 정사, 부사, 종사관을 삼사(三使)로 하여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을 골라 제술관과 3명의 삼사 서기를 맡겼다. 제술관은 남옥, 정사 서기는 성대중, 부사 서기는 원중거, 종사관 서기는 김인겸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행단은 함께 따르는 자들을 합해 총 472명이나 되는 대 인력이었다. 조엄은 바로 이 통신사의 인솔 책임자이자, 사행의 우두머리로 일본행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조정은 어떤 일로 대일통신사를 파견하게 된 것일까? 이때의 사행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제9대 이에시게(德川家重)가 물러나고 그의 아들 이에하루(德川家治)가 계승하여 옛날의 우호대로 양국 관계를 지속하길 청하므로 승습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당시 통신사절은 일본에서 여정을 거칠 때마다 현지의 문사들과 시와 필담을 주고받았다. 그 역할을 맡은 이는 주로 제술관과 3명의 서기로, 이들은 서얼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볼 부분이 있다. 왜 이전에 임명된 정상순은 사행길을 마다하고 굳이 유배길에 올랐을까? 그것은 사행길이 길고 험한 항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문벌이 좋은 사대부 문인들은 이를 위험한 일로 여겨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관료, 사대부의 전반적 의식이 조선은 문화 시혜국이고 일본은 야만국이라 하여 일본을 얕잡아 본 데서 기인한다. 이런 이유로 당시 조선의 관인 중에는 통신사행을 강하게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런 판에 조엄은 통신정사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사행길에 오르게 되고, 사행 첫 기항지인 대마도에서 운명적으로 고구마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고구마, 조선과 고구마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진다. 이 점은 뒤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사행 후 경력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후 조엄은 그 뒤 대사간, 한성부윤, 예조‧공조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했다. 1765년 조엄은 세금 징수 및 운반에 일대 변혁을 꾀하는데, 창원에 마산창, 밀양에 삼랑창, 진주에 가산창 등 조창(漕倉)을 설치하여 전라도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지역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이로써 납부자인 백성들이 자력으로 운반해야만 했던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는 크게 줄어든다. 또 그 효익은 백성들의 부담 경감과 국고 수입 증가로 이어졌다.

 

종전부터 경상도 지역의 세곡 운수는 진주, 창원 등 20여 읍의 구조적인 폐단으로 지적되어 왔다. 읍에 사선(私船)이 있었으나 선주는 서울에 있어,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이권을 거머쥐고 전횡을 일삼았다. 즉, 세금 운송책이라는 이권 사업에 정・관계의 큰 손들이 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선으로 운행하는 세곡선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너무 많이 적재하거나 기한을 어겨 세곡이 변질되기도 했고, 파선・침몰 등의 사고가 잦아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다시 거두어들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정은 자주 발생했고, 때 맞춰 세곡을 납부하지 못한 백성들 중에는 조세 미납으로 인한 죄인이 속출했다. 이에 조엄은 새로운 조창제를 만들고 인근지역의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조운선을 거느리고 가서 세곡을 납부하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읍(邑)의 세금과 공납을, 100리 안의 지역은 공물로 내하도록 하고 100리 밖의 지역은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또 직접적으로 부역이 없는 백성들의 경우에는 세금 수송 인원으로 충원시켜, 평상시에는 운송 임무를 수행하고 전란이 발생하면 수비임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이 같은 조엄의 정책안은 ⟨조전사목(漕轉事目)⟩으로 상세히 정리되어 시행된다. 당시 조엄이 취한 이 같은 법제는 당나라 유안(劉晏)의⟨선장의(船場議)⟩와 반계 유형원의 정책안을 반영한 것이었다.

 

유안이 누구인가. 그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궁핍해진 중국 당나라 재정 회복에 진력을 다해 소금 전매사업을 개량함으로써 세입의 반에 달하는 막대한 이윤을 취했고, 그로인한 이익의 일부를 이용해 운하 수송 방법을 정비했으며, 매년 100여 만 석에 달하는 쌀을 화북(華北)으로 운반토록 한 국가 재정전문가 아니었던가. 또한 유형원은 중농사상에 입각해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게끔 전제(田制) 개혁을 주장한 조선후기 실학자였다.

 

조엄이 이 같은 정책안을 받아들인 건 비록 당파로는 당시 최고의 기득권층인 노론에 속했지만, 일반적인 기득권층과 달리 보다 실용적인 사고를 한 것을 보여준다. 정책의 효과는 매우 커서 시행한 지 7~8년 만에 폐단은 상당 부분 해소되고 관・민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조엄은 행정 수완에도 탁월했다. 1770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평안도 감영의 공채 30여 만 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그동안 누적되어 온 폐해를 일소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토호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으며 그를 곤경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는 이 일로 파직되었으나 곧 혐의가 풀려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뒤에 다시 문제가 된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洪國榮)이 조엄에게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했다고 무고를 하면서 파직된 것이다. 이들은 정조가 세손 시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인물로, 정조 집권을 반대 내지 방해한 세력이니 이 같은 홍국영의 무고는 조엄도 빗겨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평안도관찰사 재임 시 부정 혐의가 다시 불거지게 되어, 조엄은 재물을 탐하고 백성을 학대한 탐관으로 지목되고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의 만년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유배지에서 사약을 기다리던 중 아들 조진관의 상소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다시 유배되지만, 이듬해인 1777년에 끝내 병사하고 만다. 향년 59세였다. 조선 후기,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가 시급했던 시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혁신가의 어처구니없는 말로였다.

 

조엄 다시 읽기

풍양 조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가전(家傳)에 의하면, 조엄은 원래 기품이 단단하고 강직한 인물이었고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남쪽 지방으로 벼슬살이를 다니는 동안 가래 끓는 병을 앓아 고질병이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만년에 풍상을 겪고 오랫동안 습한 곳에서 거주하는 바람에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당쟁으로 인한 유배 생활이 불러온 비참한 말로의 전주곡이었다.

 

조엄의 하직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귀양살이를 풀어주라는 특명을 내렸고, 장례의 뜻에 따라 경기도 양평에 있는 묏자리를 임시로 쓰게 했다. 그러던 1782년 겨울, 나라의 경사로 인해 직첩을 다시 내려주는 은전을 베풀었다. 그 뒤 현재 무덤이 있는 원주 경장리의 작대동에 예식을 갖추어 묻도록 했다.

 

그 뒤 조엄은 아들 조진관이 일품계에 오르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1814년에는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조엄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스러웠던 걸 알 수 있다. 그의 성격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결단력이 있어 임금을 섬김에는 일찍이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버리어 국가를 위하려는 강개한 뜻을 두었고 남의 과실을 용납하지 아니하여 비록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라도 반드시 면전에서 꺾었으며 그랬다가도 그가 개선한 것을 보기만 하면 다시 기뻐하여 대우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나는 남의 옳지 못한 점을 보면 참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나의 과실(過失)이다”고 하였다. 평소의 생활에서는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외식이 없었으며 재물에 임해서는 종족이나 붕우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활달하였다. 공은 문사를 다룸에 있어 전아(典雅)하고 기교부리기를 좋아하지 않아 오직 말이 잘 통하고 이론이 맞게 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

 

다음 일화도 조엄의 강직함을 잘 보여준다. 그는 1753년(영조 28) 홍문관 교리와 서학교수(西學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임금과 세자가 함께 있는 강연(講筵)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주장을 당당히 들어내고 있다.

 

“신에게 마음에 잊지 않는 염려가 있는데... 술과 여색(女色)은 사람을 죽이는 도끼이니 젊은 자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노인이겠습니까?... 신은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정성으로 감히 이 두 자[酒色]를 우러러 권면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이런 말을 하니, 참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세자가 바야흐로 입시하여 있는데, 또한 풍자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그 아비의 아들이다. 유신은 바야흐로 젊으니, 모쪼록 뜻을 거스르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주 이것을 세자에게 면계(勉戒)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조엄이)

 

“신이 드리는 말씀은 상감에게만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궁에게도 진계(陳啓)하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그 무렵 영조는 술을 자주 마시고 여색을 즐겼는데, 조엄은 임금의 이런 점을 자신의 아버지께 간청하듯 절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더구나 세자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부자를 싸잡아 한 말이니 작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영조로서는 한방에 체면을 구긴 셈인데, 오히려 조엄이 부친 조상경을 닮아 강직하다고 칭찬까지 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신하들 사이에서는 극히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영락없이 강직한 지사(志士)형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1755년(영조 31) 조엄이 이조참판 조명채, 안변부사 황경원을 파직시키라는 상서를 올린 가운데 당시 조정의 난맥상을 낱낱이 밝히고 있었는데, 조정의 문제는 물론 세자의 무기력함도 아울러 질타하고 있다.

 

국가의 일은 끝이 없습니다. 조정은 사방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조정이 올바릅니까? 징계와 성토가 엄격하지 않아 난역(亂逆)이 두려워함이 없으며, 기강이 진작되지 않아 여러 가지 공적이 좀스러우며, 용렬한 사람이 등용되어 명기(名器)가 크게 모람되었고, 아첨하며 진출하기를 다투어 청렴한 절개가 크게 무너졌으며, 세금은 번거롭고 역사는 과중하여 백성들의 고달픔은 구제할 수 없고, 문관과 무관은 직무를 게을리 하여 강도와 절도가 생겨나는 근심을 금하기 어려우니, 이는 바로 군신 상하가 밤낮으로 힘을 쓰며 두루 다스릴 계책을 강구하여야 하는데, 전하께서는 위에서 잠자코 팔짱만 끼고 있으며 뭇 신하들은 아래서 눈앞의 안일만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일로 책임이나 모면하고 그치는데 불과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어떻게 국가의 형세를 튼튼히 하고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걱정스러워 탄식합니다.

 

조엄은 조정의 풍토가 이렇게 된 이유를 곧은 말을 하는 자가 없고, 권세에 아부하며, 벼슬을 요행으로 얻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통신사를 갔다 온 수고를 했다 해서 동서로 당파에 붙따르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 조명채(曹命采)를 경연(經筵)에 추천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대충 타협하고 권력을 지키려하기 보다 이 같이 강직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정적들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끝내 무고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제거되고, 그로인해 실의와 좌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휘어지지 않는 그의 성품 탓이 크다.

 

*

조엄이 김해로 유배를 가자, 그의 부인인 예조판서 현보의 딸 풍산 홍씨는 남편을 따라 귀양살이에 나섰으며, 92세에 세상을 떠나 조엄 묘 옆에 묻혔다. 슬하에는 장남 조진관과 차남 조진을 두었는데, 그중 조진관은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

조엄의 후손들은 풍양 조씨 세도가의 중심인물로 19세기 중앙정계의 중심 세력을 이뤘지만, 정작 조엄은 강직한 성품으로 당파로 얼룩진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며 불운한 여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만년 불운은 그가 남긴 족적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한다. 조정 내부의 권력 쟁투는 외부에 눈을 돌림으로써 조선 정부가 아닌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려 한 그의 혁신적 활약상을 한 치도 가리지 못한다. 당대 권력의 최고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역사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고 오늘날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지만, 조엄은 의생활 혁신가 문익점과 더불어 식생활 혁신가로 역사에 이름을 드높였다.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조엄을 다시 보는 이유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