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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 일본에 가다

by 전경일 2012. 9. 4.

조엄, 일본에 가다

 

조엄이 대일통신사로 파견될 즈음 조선은 수년간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고, 국가적으로도 재정 및 경제상 어려움이 컸다. 특히 1757년(영조 33)에는 서울에만 굶주려 죽는 자가 8,700명에 달했고, 자작농들은 당장 허기를 면하기 위해 지주들에게 토지를 넘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763년 3월에는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48만 명의 기민이 발생했다. 또 아사자가 450여 명이나 되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다. 이에 국왕 영조는 기민들을 불러 직접 처참한 참상을 듣고, 자신의 반찬을 줄이도록 명했다. 또한 소의 도살을 엄금하였으며 궁중에서 사용하는 연여(輦與) 장식에 금 대신 주석을 사용하라며, 사치 풍조를 금하는 금사령(禁奢令)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전국에 조세를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며 경기, 삼남 일대에 환곡 1만석을 긴급히 풀어 기민구제에 쓰도록 명했다.

 

흉년이 들자 통신사의 규모도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이전 사행과 달리 조엄의 통신사는 간소하게 꾸려졌다.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조엄은 당시의 사정을 이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금번 행차에 있어서는 지공하는 범절을 전에 비해 줄였고, 역원의 사인으로 따라가는 사람도 금하였으며, 각 고을에서 배정하여 잡히는 역졸이나 역마 등의 일까지도 일체 간략하게 할 것을 지휘하였다.

 

이전 통신사 행렬 때는 조정의 관원들이 남대문 밖까지 나와서 무사안녕을 빌어주며 성대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조엄 일행에게는 전송객 수십 명 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조엄 일행이 한강을 건너 양재역에 묵을 때에도 일행의 가족 친지들은 한 사람도 강을 건너 배웅을 할 수 없었다. 다만 홍익빈 등 일곱 명이 강을 건너서 작별 인사를 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조엄은 다음과 같이 섭섭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옛날에는 온 조정이 남교(남대문 바깥의 교외 지역)에까지 배웅 나와 주었다고 하는데, 금번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아서 (좋은) 풍속의 쇠퇴와 조정의 푸대접이 한탄스럽다.

 

전송객들이 한강을 넘어서 배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앞서 정사로 지명되었던 서명응이 내린 조치 때문이었다. 이 같은 지나친 조치에 대해 조엄은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너무 곧게 한 격이다.(矯枉過直)

 

너무 경직된 처사라는 평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당시 조선이 처한 경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길을 떠나는 조엄은 의욕에 넘쳐 있다.

 

왕사(王事)를 마치고 관문을 나서니... 정신이 쾌활하여 마치 새장에 갇혔던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하다. 일행의 상하가 모두 기뻐서 뛰었으며, 병을 앓던 자까지도 억지로 기동하여 모두 몹시 앓던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였다.

 

그 무렵 국가 재정의 궁핍은 일본에 보낼 예단 준비마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게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조엄 일행은 전례대로 예단을 준비하고 1763년 8월 3일 국서, 서계(書契), 예단, 잡물과 영조가 친히 써서 준 ‘잘 갔다 잘 오라’는 ‘호왕호래(好往好來)’를 받들고 서울을 출발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사정은 통신사 일행이 육로로 충주, 안동, 경주를 차례로 지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게 되면 조정에서 명하여 전별연(餞別宴)을 차려주도록 했는데, 이마저도 없애고 동래에서만 좌수사 주최 하에 잔치를 베푼 것이다.

 

조엄이 속한 제11차 통신사의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내부 문제로 인한 통신 삼사의 잦은 변경으로 조엄은 사행 출발 20일 전에야 정사로 임명 되었으므로, 당시 사행원의 편성 및 준비를 점검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의 자료는 이 같은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에 서명응, 엄린, 이득배를 세 사신으로 차출하였다가, 떠날 무렵 다른 일로 인하여 아울러 그 직을 갈고 새로 제수하니, 자못 전진(戰陣)에 임하여 장수를 바꾼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자제군관(子弟軍官) 이외의 원역(員役) 이하는 한결같이 전번 사신이 이미 차정(差定)한 대로 하였다.

 

이러함에도 조엄은 정사의 임무가 실로 무겁고 어려운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겸손하게 피력하고 있다.

 

오랑캐 나라에 가서 전대(專對)하는 임무란 옛적부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원래부터 흔히 굉장한 재주와 위대한 역량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나와 같은 용렬한 사람이 그 자리에 충당되는 것도 이미 괴람한데, 하물며 이 상사(上使, 정사)의 임무이겠는가?

 

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도리가 진실로 거느리는 사람의 여하에 달린 것인데, 5백 인의 사람을 거느리기는 실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기보다도 어려운 점이 있으니, 나 같이 재간 없는 사람으로는 진실로 이 상사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소... 충(忠)과 신(信)만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성현의 훈계에 따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성상의 뜻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소.

 

상황은 어려워도 인솔 책임자로서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같은 우여곡절과 결심 끝에 조엄 일행은 사행을 떠나게 되고, 새로운 기회와 만나게 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