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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표적집단 면접법’과 자원 투여 전략

by 전경일 2013. 1. 21.

‘표적집단 면접법’과 자원 투여 전략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제주도로 보낼 생각을 했던 것은 1719년부터 1763년 사이 제주도에 유독 기근이 많이 들었다는 점이 크게 반영된다. 또한 사행중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서 제주도 표류민을 만난 일도 작용했다. 조엄 통신사 일행은 1764년 6월 귀로에 대마도에서 제주도 표류민들이 귀국선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을 불러 격려한 일이 있다. 이때 재배법을 기록하고 있던 조엄은 표류민 일행을 만나 위로하며 제주도의 토양이나 기후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 확인 작업을 했다. 땅과 작물간의 상관성에 주목해 간접적이나마 현장체험을 한 것이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구마가 충분히 아침・저녁을 대신할 수 있는 미곡 대체재라는 점, 우리도 널리 재배했으면 좋겠다는 점, 고구마의 이로움을 중국과 일본만 독전(獨專)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제주도민이 표류한 것은 1763년이고, 돌아온 것은 1765년이니 이들은 최소 2년여 간 매일 고구마 5개씩을 먹어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어로작업을 하다가 표류한 사람들로 장정 4명, 여인 3명(1명 임산부), 어린아이 3명의 가족단위였다. 한 두 가족 단위로 샘플링해서 자체 테스트를 해 온 셈이다. 그들의 평가는 고구마 도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추측해 보건대, 고구마를 이용한 조리 방식도 다양했을 것이다. 물릴 만도 한데 이들이 이렇게 답변한 것은 구황 대체재로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마케팅 기법으로 소수의 응답자와의 집중적인 대화를 통해 정보를 찾아내는 소비자 면접조사 기법인 ‘표적집단 면접법(FGI, focus group interview)’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조엄은 고구마의 효익을 맛을 직접 본 수요자이자 목표시장의 소비자들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지인을 통한 점검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이 점은 조엄이 결심을 강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먹거리 혁명이 가져올 사명감에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인터뷰 그룹이 밝힌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만 독전(獨專)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언급이다. ‘독전(獨專)’은 ‘독점(獨占)’을 뜻하는 것으로,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실은 ‘독전을 깨는 경제활동’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목적은 보편적 효익을 다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팀 전체의 지대한 관심

 

이전과는 다른 조엄 사행단의 특징은 조엄식 관심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리더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수행원 전체 관심사로 승화되고 있다. 통신사행에 동행했던 성대중, 김인겸, 원중거 등도 모두 고구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종사관 서기로 동행한 김인겸의⟪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를 보면, 조엄과 함께 사행에 동행한 다른 사람들도 쌀과 바꿔 구해 쪄 먹어보면서 맛과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고 있다.

 

도중(島中)이 토박(土薄)하여 생리(生理)가 가난하니 효자우(孝子芋, 고구마)를 심어두고 그것으로 구황한다 하기에 쌀 서되 보내어서 사다가 쪄 먹어보니 모양은 하수오(何首烏), 그 맛이 극히 좋다. 마 같이 무른데, 달기는 더 낫도다. 어서 내어다가 우리나라에 심어두고 가난한 백성들을 흉년에 먹게 하면 진실로 좋을 것 같다 만은 취종(取種)을 어이하리.

 

여러 수행원들이 직접 맛을 보고 종자용으로 가지고 온 것을 알 수 있다.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는 일종의 ‘사행단고구마’였던 것이다. 원중거의 경우에도 사스우라로부터 도요자키(豊崎)에 이르는 해안사 남쪽 양지 바른 곳에 고구마 종자를 보관하는 허막(虛幕)을 수십 곳 살피고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조엄 이외에도 사행에 참가한 많은 수행원들이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식량 문제 해결이라는 공통된 사명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에서는 부산 왜관무역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1715년 고구마 도입 이후에는 부족한 식량 분을 고구마로 대체하고 있었다. 순조 9년(1809) 대마도로 갔던 도해역관(渡海譯官) 현의순, 최석은 대마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마도가 먹고 사는 것을 오로지 우리나라에 의존하고 있는데,.. 곤궁한 백성은 감저(고구마)를 식량으로 삼고 있습니다.

 

조엄에게 고구마는 매우 신선한 접촉이면서 뜻밖의 발견이자,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근본적 변화를 이끌 주요 수단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먹거리 대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요는 통신사의 다른 수행원들이 단순 호기심 수준에 머무는데 반해 조엄은 적극적인 도입의지를 보였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이 점이 뭇 사람들과 달랐다.

 

이처럼 조선은 1719년에 제9차, 1748년에 제10차 통신사행사을 파견하였지만 제11차인 1763년에 이르러서야 사스우라에 기항한 통신사 일행에 의해 ‘가치’가 발견된다.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는 통신사들이 ‘고구마를 일찍 보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 없이 ‘가치’는 픽업되기 어렵다.

 

그 무렵 많은 조선의 관료 사대부들이 현상유지전략 하에 기존 정책을 고수하고 기존 정책 내의 실행으로 한계가 분명한 방식에 몰두할 때, 조엄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의 기아 문제가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이 조건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고구마라는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혁신을 가속화시키고 효능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부 관료들이 조직 속에서만 선택할 때, 조엄은 선택의 프레임을 밖으로 돌려 새롭게 설정했다. 고구마라는 신종 대안은 이렇게 해서 불가피한 기아 조건을 면하는데 쓰였다.

 

오늘날 기업 임원들은 하루 중의 대부분을 내부 문제에 힘을 쏟고 있는 반면, 외부 환경조사에 투여하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진다. 내부에 집중할 때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조직 내 자신의 위치다. 외부의 성과 창출에 힘을 쏟기보다도 몇몇 인사들하고만 손발을 맞추면 계속 승진해 올라갈 수 있다. 이런 점이 기업으로 하여금 성장 엔진 발굴에 취약하게 만들고, 그로인해 점차 하강국면에 접어들게 한다. 당시 조정 내부 문제에 골몰했던 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하였다. 이 점에서 조엄은 다르다.

 

조엄은 조선의 기아 문제를 풀기 위한 문제의식이 있었으며, 그 같은 관심은 고구마를 만나 표출되었다. 고구마는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는 당시 최대의 식량문제 해결책이었다. 조엄이 취한 행동력은 오늘날 시장의 요구를 파악해 강한 니즈가 있는 상품과 서비스로 새로운 고객욕구를 석권해 가는 많은 초우량기업들의 행로와 비슷하다.ⓒ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