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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확산 모델과 지식 누적 시스템

by 전경일 2013. 3. 20.

 확산 모델과 지식 누적 시스템

 

조엄의 고구마 프로젝트에는 최초에 조엄이 등장하고, 곧 바로 투톱 시스템이 적용된다. 고구마가 조선 남부지방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64년 8월 동래부사로 강필리가 부임하면서였다. 전래자 조엄이 초발혁신가라면 실질 초발확산가는 강필리가 자임했다. 강필리는 1764년 8월 20일 동래부사로 취임해 2년 후인 1766년 11월 이임했다. 조엄이 일본으로 떠난 1763년 10월 6일에서 귀국한 1764년 6월 22일 사이 동래부사는 송문재였다. 그러나 그가 신병으로 인해 사임하고 나자, 8월 20일 강필리가 부임한 것이다. 조엄과 부임시기가 맞지 않아, 프로젝트의 성공은 운에 맡겨질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조엄이 귀국길에 가지고 온 종자는 다시 신임부사 강필리에게 성공적으로 인계되어 빛을 발하게 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선임자가 바뀌면 후임자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선임자의 흔적을 지우는데 재임기간을 다 쓰기도 한다. 이전의 연구물이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인수받아 성공으로 완결해 내는 경우란 흔치 않다. 그러다보니 이전의 많은 투자가 버려지는 비용(sunk cost)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래서는 자원 낭비만 있을 뿐이지 뛰어난 결과를 이뤄낼 수 없다.

 

앞서 다뤘다시피 고구마를 처음 파종한 이는 부산진 첨사 이응혁이었다. 그는 1764년 봄 부산 절영도에서 처음으로 종자를 파종했다. 강필리는 1764년 6월 조엄이 다시 가지고 온 종자를 받아 뒤늦게 부사로 부임한 뒤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런데 두 사람 간에 큰 차이가 엿보인다. 첫 파종을 한 이응혁은 별다른 자료도 남기지 않았고 역할이 미미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달리 강필리의 역할이 실로 눈부시다는 점이다. 강필리의 작업은 프로젝트를 완결 짓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강필리가 동래지방에서 첫 파종한 시기는 1765년 봄이다. 그리고 첫 수확을 한 것은 그해 가을이다. 조엄이 2차로 종자를 전달할 당시 일본에서 조사한 재배자료를 함께 전달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엄의 뒤를 이은 강필리는 이것을 업그레이드 해 더 많은 연구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조엄이 전해준 자료와 스스로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1766년에 ⟪감저보⟫를 간행한다. 재배법과 저장법을 밝힌 이 육종서는 단순히 조엄이 전한 종자를 심은 수준을 뛰어넘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의 과학화를 이끈다.

 

그리하여 부산 절영도에서 첫 재배된 고구마는 이후 강필리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1764년 이응혁이 부산 절영도에서 시험 재배한 이후, 그 다음해인 1765년 동래에서 강필 리가 2차분을 대량 증식하여 전국으로 전파한다. 여기에 초발혁신을 초발확산의 계기로 삼은 초기 확산자들이 등장해 프로젝트는 더욱 활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강필리로부터 고구마 종자를 얻어가 퍼뜨린 강계현과 이광려가 그들이다. 강계현은 1764년에, 이광려는 이듬해인 1765년에 종자를 얻어 전국범위로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가 그것이다. 지식이 누적되어 가는 과정은 ⟪증보산림경제⟫속 내용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강필리가 1765년과 1766년 2차에 걸쳐 동래에서 파종하고 재배하면서 얻은 지식 이상의 내용까지 수록되어 있다. 강필리는 ⟪감저보⟫를 저술하면서 조엄의 자료를 참고했고, 초량왜관에 있는 대마도 왜인들을 통해 대마도 유학자 토야마 돈오키나(陶山鈍翁)가 저술한 육종서를 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대마도 농민 하라다사부로 우에몽을 시켜 종자와 재배법을 배워오게 해 대마도 전역에 확산시킨 유학자였다. 이런 까닭에 대마도는 1732년 대기근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일본 내 전국 확산을 이끈 이는 아오키 곤요(靑木昆陽)로 그는 종자 재배지를 만들어 양성해 전국적으로 보급해 ‘감저선생’으로 불렸다. 한일 간 비슷한 점은 유학자들이 앞장서 고구마를 전파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이들이 지식인이자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한 목민관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강필리는 바로 그 같은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다.

 

조엄과 강필리는 고구마 프로젝트를 지속적인 개선과 공통된 통찰력으로 성공시켜 나갔다. 구황작물로서 고구마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고, 조엄이 인식했든 못했든 고구마는 이후 다양하게 이용되며 식생활 개선책으로 작용해 갔다. 나아가 조선 먹거리 경제의 든든한 밑받침이 되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