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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산업의 머리채를 잡고, 하나에서 열까지

by 전경일 2013. 5. 23.

산업의 머리채를 잡고, 하나에서 열까지

 

플라스틱 사출의 성공은 구인회로 하여금 산업분야로 한 발 더 힘차게 내딛는 계기가 된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1952년 9월에는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한다. 곧이어 10월에는 부산시 범일동에 기존 건물을 사서 공장을 짓고 최초의 합성수지 제품인 '오리엔탈' 상표의 빗과 비눗갑을 만들기 시작한다.

 

전쟁 통이었지만, 사람들은 생존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확인하려 들었다. 먹을 것을 찾아 극심한 노동을 해댔고,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많이 낳았으며, 생활의 질을 개선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런 욕구에 맞춰 락희에서 만든 플라스틱 빗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전쟁 중에도 우리 산업의 맥박은 힘차게 요동 치고 있었다.

 

죽음은 삶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 특징이 있다. 부산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들끓으며 삶이 억척스럽게 돌아가는 역동적인 현장이었다. 급변의 시기에 남다른 부를 일구려는 기업가들은 한반도의 끝자락에서 힘겹지만 힘찬 도약을 꿈꾸며 용틀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제상사를 만든 양태진도 그 무렵 범일동의 한 정미소 자리를 빌려 신발공장을 차리고 있었고, 태광산업의 이임용도 범일동 시장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포목점을 벌여 놓고 있었다. 한일합섬의 김한수도 국제시장에서 육중한 체구를 놀리며 물건을 팔러 다녔고, 동양시멘트의 이양구도 국제시장에서 설탕 장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용이 되기 위한 이무기의 시간을 부지런히 보내고 있었다.

 

락희의 이런 맥박은 부산으로 피난 내려 온 대한민국 정부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재형 상공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락희에서 만든 플라스틱 빗의 견본을 진상하며, 대한민국 경제의 미약하나마 힘차게 뛰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대통령은 플라스틱 빗을 받아들며 이렇게 반색했다.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나?"

 

그렇게 향도 부산에서의 구인회의 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은 초기 상품들이라 가격도 후했다. PX에서 흘러나온 미제 머리빗이 1타에 150원에서 200원 할 때 럭키의 '오리엔탈' 빗은 200원에 시장으로 마구 흘러 나갔다. 외산 내지 외제의 첨병이 PX제품으로 인식되고 있던 터라 PX를 꺾었다는 구인회의 자부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장에서 물건을 싣고 나가던 트럭이 경찰에 의해 밀수품으로 오인된 적이 있다. '오리엔탈'이라는 영문 표기만 보고 밀수품으로 단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구인회는 무릎을 쳤다. 외산 선호 일변도의 사회 풍토에서 경찰도 외제로 오인할 정도라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들어 구인회는 공장을 부전동으로 확장ㆍ이전해 자동식 사출성형기 4대를 추가로 도입한다. 이제 수동기로 성형하는 단계에서 자동으로 성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자동기기로 구인회는 칫솔, 비눗갑, 세숫대야, 식기 등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사업이 힘차게 돌아갈수록 구씨 형제들과 허씨의 협업체계는 날로 발전돼 갔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6월, 구인회는 마침내 부산 연지동에 3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대형공장 건립에 착수한다. 초기 성공을 계기로 새로운 사업과 아이템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9월 들어서 국제청년회의소(JCI) 총회가 열리자, 이를 계기로 구인회는 미국으로 출국하는 넷째동생 구평회에게 특명을 내린다. 치약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구해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는 전쟁 기간 중 미군이 사용하는 치약을 보고 얻은 아이디어였는데, 이를 계기로 락희는 플라스틱 제품에서 화학제품으로 사업을 넓히는 전기를 맞는다. 구인회로서는 기존에 우위를 지닌 분야에서 타 분야로 경쟁력을 확장시킴으로써 신수종 사업을 키우려는 전략이었다.

 

다음 해인 1955년 1월에는 준공된 연지동 공장에서 비닐원단과 플라스틱 제품들이 대거 생산된다. 이어 3월에는 드디어 럭키치약이 생산되어 오랫동안 국내시장을 독점하며 락희의 기반을 굳건히 굳혀 나갔다. 이로서 구인회는 플라스틱 빗에서 칫솔로 옮겨 치약까지 개발해냄으로써 명실상부 수직ㆍ수평적 그룹 구조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처럼 1950년대는 락희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 나가며 다방면에 걸쳐 산업의 초기 진출을 꾀하고, 그룹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던 시기였다.

   

기술혁신과 사업 확장은 50년대를 줄곧 달려오게 한 견인차였다. 1956년 11월에는 락희화학이 3차로 생산시설을 확장해 PVC 파이프를 국내 최초로 생산해 냈고, 1957년에는 비닐 장판과 폴리에틸렌 필름을, 1959년에는 스펀지 레진을 각각 개발해 냈다. PVC 파이프는 전후복구사업과 맞물려 수요가 크게 늘었으며, 국내 최초로 개발한 스펀지 레진과 비닐 장판은 가장 혁신 제품으로 위치를 점했다. 플라스틱 사출에서 시작한 사업이 유관 산업 분야까지 다 먹어 치웠던 것이다.

 

이 모든 성장의 순간이 LG 발전사와 함께 한다. 분명한 점은 이런 혁신의 중심에 언제나 창업자 구인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 구씨ㆍ허씨 양 집안 사람들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가 똘똘 뭉쳐 혁신적인 동업의 역사를 탁월하게 이루어 낸다. 오늘날 LG그룹이 전 세계적 경영학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구인회의 리더십과 그의 비전을 현장에서 실천함으로써 현실화시킨 많은 창업 동지들, 동업자들 때문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