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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누가 뭐래도 품질만은 꼭 잡는다

by 전경일 2013. 5. 27.

누가 뭐래도 품질만은 꼭 잡는다

 

"크림 백통 가운데 한 통이라고 불량품이 섞여 있다면 다른 99개도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지요. 아무거나 많이 파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통을 팔더라도 좋은 물건을 팔아서 신용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기업이 고객과 만나는 접점은 상품이든 서비스든 품질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LG는 창업자 구인회 때부터 신용과 품질을 쌍두마차로 달려왔다. 신용과 품질은 별개가 아니다. 맞물려 돌아가며 기업을 성장시키고 시장 내 기업의 지위를 결정짓는다.

 

해방 이후 부산에서 시작한 화장품 사업이 그렇다. 1950년 한국 전쟁 와중에도 구인회는 지속적으로 품질 개선에 몰입한다. 반투명 크림은 이렇게 탄생한다. 일본 크림 중에 '메이쇼쿠(明色)'라는 반투명 크림이 있었는데, 구인회는 경쟁자를 따라잡겠다는 의지로 기술 혁신에 나선다. 일등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완벽주의 사고였다.

구인회식 혁신의 노력은 훗날 도약의 발판이 된다. 생산된 럭키 크림은 부산국제시장을 무대로 인근 도시로 팔려 나갔다. 판로도 계속 확장돼 갔다. 전란 중이었지만, 호경기도 이런 호경기가 없었다.

 

흔히 생각할 때 전쟁이 일어나면 화장품 같은 소비재는 위축될 것 같지만, 오히려 삶에 대한 갈증은 소비를 진작시킨다. 게다가 부산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꾸밈새에 화장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게 전시 경제의 특징이자, 새로운 트렌드였다.

 

부산 시절, 투명 크림을 개발해 내며 락희가 고성장을 이룬 배경은 무엇일까? 원료의 하나인 향료의 일대 혁신에 있다. 뒤에 구인회가 대한화장품공업협회 이사장이 되는 것은 한국화장품업계의 1인자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끊임없는 기술 혁신 공로로 기존 화장품 시장의 고객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기 때문이다. 고객과 함께 발전한다는 LG의 기업관은 이런 경험이 작용한다.

 

구인회와 락희의 혁신은 요즘같이 특별히 무슨 품질개선 운동 같은 걸 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믿었고, 그 같은 경영정신이 모든 사업에 걸쳐 나타났다. 치약을 만들 때에도 혁신을 모태로 삼았다. '럭키 치약'은 1955년 3월 피나는 노력 끝에 연지동 공장에서 최초로 시험 생산이 성공하여 그해 가을부터 본격 출시된다. 선진국 업체로부터 제조 공법을 이전받아 제조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주워 모은 토막 정보와 기술로 개발하고 생산한 순수 국산품이었다. 그 점에서 락희 임직원들의 자긍심은 대단히 높았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윌링 스피리츠(Willing Spirits)가 조직 내부에 활화산처럼 번져 나갔다. 이처럼 락희의 약진은 혁신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럭키치약이 치약의 대명사인 '콜게이트'를 물리치고 국내시장을 석권한 것은 가장 어려운 전후시기에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3년차에 접어든 1956년 봄이었다. 이때 락희는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서 치약 10만개를 무료 증정하는 행사를 열었다. 럭키치약이라는 브랜드를 고객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활 속에 완전히 정착시켰다. 럭키치약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경쟁사는 좀처럼 나올 수 없었다.

 

 

<1954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치약인 '럭키치약'>

 

품질에 대한 엄격함은 예나 지금이나 LG를 지배하는 사상이다. 부산공장 시절 창업자 구인회는 여공들 틈에 끼어 불량품을 가려내는 일을 당연한 듯이 하고 있었다. 사장이 이런 궂은일을 하면 되겠느냐, 이러지 않아도 물건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데 그럴 필요 없다며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그는 정중하게 물리쳤다. 구인회가 내세운 지론은 한결같았다.

 

"언제나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창업자의 이런 엄격한 품질주의에 누구도 대꾸할 수 없었다. 시장으로부터 절대적인 권위와 신뢰를 얻고자 하는 LG의 품질주의는 창업자로부터 내려오는 DNA에 아로새겨진 경영정신이다.ⓒ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