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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혼란의 시대 이런 일이

by 전경일 2013. 5. 15.

혼란의 시대에 극도의 몰입을 하다

 

기업가에게 전쟁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 문제가 기업가에겐 모험을 할 기회라는 것을 세계 기업사는 잘 보여준다. 미쓰이 물산, 마쓰시다 등 오늘날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일본의 군수재벌들이 그렇고, 구미의 듀폰, GE 같은 세계적인 회사들도 모두 전쟁을 통해 일어난 회사들이다.

 

막대한 양의 물자를 쏟아 붓고, 적을 이기기 위한 최강의 기술혁신이 강화되고, 고급 인력을 거의 무제한 끌어다 쓸 수 있고, 원가절감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원천 기술 확보가 가능한 상황은 기회 면에서 전쟁 특수가 가져오는 가장 큰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은 사람이 죽지 않고, 기업이 존립한다는 전제조건만 서면, 기업 자체로는 해볼 만한 사업 환경인 셈이다. 물론, 이런 가정이 성립될 여지는 없지만 말이다.

 

일제가 물러간 해방 공간에서 다들 혼란에 빠져있고 미래에 대해 예측 못할 때 구인회가 부산을 본격적인 사업 거점으로 삼아, 난리 통에도 화장품ㆍ플라스틱 생산에 몰두한 것은 그가 지닌 기업가적 DNA가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가장 큰 혜택을 본 회사는 일본 기업들, 그 중 우리가 익히 아는 토요타자동차였다. 토요타는 부도 직전에 한국전쟁으로 군수차량을 미군에 납품하기 시작해 1962년까지 군납시장을 석권하며 탄탄한 기업 토대를 갖춘다. 국내에서는 LG, 삼성, 현대 등이 재벌의 초석을 닦았다. 전쟁 발발 시점부터 휴정협정이 조인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넘어 항도 부산은 전쟁의 아수라장이자 모든 욕망이 들끓는 생존과 모색의 장이었다. 피난지인 부산의 거리에 들려오는 축음기의 유행가들은 전쟁의 상처와 삶의 애환이 담긴 노래였지만, 미래의 존재감을 뒤섞은 희망가이기도 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를 풍미했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 따위의 퇴폐주의적인 유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6.25 동란으로 정부와 경제활동의 중추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무역업은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인구가 폭발할 정도로 북적거리는 임시 수도 부산은 각종 소비재와 생필품의 기근으로 기아선상에 허덕이게 된다. 정부는 무엇보다도 부족한 생필품을 외국에서 수입하도록 계획한다. 무역업은 다시 활기를 띠며 공전의 호경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엔 해방 후 무역 바람을 일으켰던 마카오는 한물가고 홍콩으로 본거지가 옮겨졌고, 무역상대국도 미국, 일본 등지로 다변화된다. 이 당시 무역업 경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훗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합상사가 되는 회사들이 이때 부산에서 우후죽순 생겨난다.

 

남한 경제의 대부분이 멈춘 상태에서 부산으로 자동 집결된 대한민국 경제는 심장만 빠르게 팔딱거리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아드레날린 주사를 찔러 더욱 박동 넘치는 심장으로 만든 것은 미군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원조물자였다. 흔히 'PX물건'으로 통하는 온갖 희한한 물건에 다들 생존의 일부를 의존하고 있을 때, 저 편에서 야심찬 기업가 구인회는 다른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과 산업을 상호 연결시키는 대담한 착상으로 과거 구인 상회나 어물 장사 때처럼 물건을 팔고 얼마의 이문을 남기겠다는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 보다는 저 막강한 자본주의 본령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기가 막힌 물건들과 한판 붙고 싶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내가 저 놈의 제품들과 한판 붙어 봤으면······."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기업가의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투지는 남다른 전략을 머릿속 캔버스에 그려나가게 했다. 사람이 사는 한 돈은 돌게 되어 있고, 먹고 입게 되어 있으며, 전쟁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와중에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 내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제든 가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업의 상태'를 상시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구인회 상점 시절 장마 후의 대풍작을 예상해 포목을 대거 사들였듯이 이번에는 물건이 아닌 기술과 상품 제조라는 원천 분야를 손아귀에 넣고 기다리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전쟁 통이다. 달리 할 것도 없이 시답잖은 물건을 들고 뛴다면 항도의 오만 가지 장사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우 구태희는 그런 구인회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을 걸어 왔다.

 

"형님, 여기 집이 있고 공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물자가 귀한 시댑니다. 물건을 만들면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남들이 제 정신이 아닐 때 우리만이라도 차분히 미래를 준비합시다."

 

아우의 예지와 구인회의 전쟁과 산업의 상호 연결성과 미래의 산업 판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이후 LG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다들 얄팍한 이해에 몰두하고 있던 전쟁 통에 오히려 구인회는 가장 깊은 자기 몰입의 경지에 빠져든다. 그것은 강력하고 대체 불가능한 기술혁신에의 집념으로 나타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