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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깨지지 않는 뚜껑' 프로젝트

by 전경일 2013. 5. 20.

'깨지지 않는 뚜껑'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1952년 봄, 구인회는 부산 서대신동 집에서 주판알을 튕기며 럭키 크림이 가져다 준 이득을 계산해 보고 있었다. 3백만 원으로 시작한 화장품 제조 사업은 불과 4~5년 만에 3억 원으로 크게 불어나 있었다. 전시 인플레이션을 반영한다 해도 엄청난 돈을 손에 쥔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호황에도 그는 화장품 연구실을 개설해 럭키 크림의 품질 개선에 온 힘을 다 쏟는다. 구인회 상회 시절 옷감에 다양한 색을 넣어 혁신을 꾀한 이래 LG의 기술혁신 정신은 이때부터 뚜렷한 전통이 된다. 더구나 창업자가 직접 뛰어들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이런 열정은 그룹의 주요한 기술 정신이 된다. 락희는 화장품 업계를 제패한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크림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덩달아 불량 반품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크림통 뚜껑의 파손은 반품으로 이어졌다. 당장 품질 개선을 하지 않는다면 사업은 악순환 구조에 올라타게 되고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면 사업은 발목 붙잡힐 게 뻔했다. 도매상에서는 연일 크림통 뚜껑이 깨진 게 많아 못 팔아먹겠다고 아우성쳤다. 구인회는 이때부터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에 모든 신경을 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 PX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플라스틱 제품들은 구인회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미국은 이미 태평양 전쟁을 겪으며 현대산업의 총아인 플라스틱 산업을 궤도에 올려놓고 있었다. 구인회는 이를 벤치마킹하여 드디어 '깨지지 않는 뚜껑'을 만들 궁리를 한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인편에 부탁해 여섯 권의 플라스틱 관련 서적을 입수한다. 고객 불만을 혁신의 계기로 삼아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락희에서 근무하던 구태희가 책을 정독하고 정리했다. 구태희의 보고를 듣는 순간, 구인회의 머릿속에는 확고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거다! 우선 깨지지 않는 뚜껑부터 만들고 보자. 품질 개선이 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며 그는 "플라스틱, 이건 다른 기회를 가져올 게 분명하다!"며 무릎을 쳤다.

 

구인회식 사업 전개 방식은 사업 타당성을 분석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원초적 직감을 믿는 편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는데 하나는 실험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치라는 것이다. 이 둘은 사업에서 지속적인 혁신과 끊임없이 연관분야로 확장해 나가는 방법론이 된다. 구인회식 방식이 'LG 방식'이 된 것이다.

 

'깨지지 않는 뚜껑'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플라스틱 사출이 필수적이었다. 플라스틱 사출업을 시작한다지만, 처음엔 어떤 기계를 들여와 어떻게 작동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일단 구해 온 플라스틱 관련 서적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으며 원리를 터득하고자 했다.

 

기계와 원료 도입이 생각처럼 되어 준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이 같은 판단이 서자 구인회는 특유의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신속히 은행 차입 없이 그간 화장품 사업으로 벌어들인 3억 원을 몽땅 투자한다. 일대사활을 건 모험이었다.

 

그의 이런 결단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난리 통에 플라스틱 사출기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제조업에서 상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정확한 선택이라고 믿고 있던 시기였다. 때는 1951년, 38선을 두고 중부전선에서는 치열하게 밀고 밀리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시 인플레이션이 몰아쳐 사업을 벌이는 것조차 위태로운데 더구나 상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한다?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누구는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구인회는 결단을 내리고 결행을 강행한다.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주변의 우려에 대해 구인회는 자신의 뚜렷한 사업 원칙을 이렇게 밝혔다.

 

"눈앞의 이익이나 손해에만 집착해 요령껏 살겠다는 것은 좋지 않으며,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보면서 해야 할 사업이다."

 

구인회식 경영에서 생각해 볼 점은 과연 기업 경영에서 정도(正道)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도 미래를 위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기업인의 정도이다. 그것이 바로 기업의 도전정신이다. 이런 시도는 남들 대비 분명한 차별화를 뜻한다. 최초로 실행함으로써 유일무이한 가치를 창출해 내는 신념이다. 구인회는 이처럼 남달랐다.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전 기대와도 달랐다. 과거의 작은 성공과도 달랐다. 그것이 LG의 정신이 되었음은 훗날 LG성장사가 잘 보여준다.

 

미국 버클레이사에 플라스틱 사출기를 주문하고 공장 부지를 마련한 한참 뒤 마침내 기계가 도착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스위치를 넣었는데 기계가 꿈쩍도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봐도 기계는 요지부동이었다. 조작 방법이 카탈로그와 다르다면, 미국에 가서 기술자를 데려올 수도 없고, 또 미국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올 수도 없고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고장이 났을 수도 있었다. 자칫하다간 3억 원의 전 재산을 털어 부은 기계에서 고철 값만 건질 판이었다.

 

"기계야, 제발 돌아가 다오."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기계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형제 중 누군가 아무래도 전력이 약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말했다. 전시중이라 전력에 정격 전압이 공급될 리 없다는 것이었다. 변압기를 설치하고 다시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 싶게 기계가 왕왕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한국 플라스틱 산업이 태동되는 순간이었다. LG가 한 산업 영역에서 막강한 리더십을 확보하는 순간이자 이후 그룹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