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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혼을 다하는 경영만이 해답이다

by 전경일 2013. 6. 4.

혼을 다하는 경영만이 해답이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 마쓰시다 그룹의 고노스케 회장은 전기소켓에 양쪽으로 구멍을 뚫은 제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후 일본 산업을 일으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진정한 혁신에 이른 기업가였다. 군국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기업인들이 나서서 다시 일으킨 것이다. 산업보국이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암울했던 일제하에서부터 해방시기까지, 그 이후에도, 구인회의 혁신 정신은 고노스케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그 무렵 용틀임 하던 많은 국내 기업가들의 장점보다 많은 면에서 뛰어나다.

 

구인회의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는 어렸을 때의 일화가 있다. 구인회는 지수 보통학교 시절 장근회(獎勤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활동이 다분히 기업가적이었다. 또래들이 모여 놀고 있는 황무지를 갈아엎어 채소를 심고, 인분을 푸기까지 했다. 토마토, 가지, 오이, 시금치, 무, 배추 등 신종 씨앗을 구해와 심고, 책을 통해 재배기술을 연구하며 익혀 많은 수확을 얻어 내곤 했다.

 

재래식 기술을 신식 기술로 대체해 가며 혁신적인 결과를 내놓자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그때 이미 이런 실험을 통해 돈을 만들어 내는 원리를 고안해 낸 것 같다. 혁신적인 실험은 돈으로 바뀌어 지고 그 돈이 사업자금이 되는, '돈이 만들어 지는' 메커니즘을 터득한 것도 이때였다. 개인적으로도 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의 이런 실험 정신은 부산에서 출범한 락희화학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구인회의 트레이드마크는 때에 전 미군 군용 파커 점퍼였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작업장에서 그를 분간해 내는 건 손쉬웠다. 원료가 덕지덕지 묻은 미군파커를 입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됐기 때문이다. 그는 현장에서 언제나 파커를 입고 있었고, 바깥출입을 할 때만 옷을 갈아입었다. 무서운 현장 중심주의이다.

 

현장을 중시하는 구인회식 경영철학은 그의 동생과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까지 번져 나갔다. 구인회는 옷 따위에 신경 쓸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사업 자체에 몰두했으며 상품의 질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였다. 그 무렵 그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지 당시의 사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해방직후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을 인수한 업자가 20여명 가량 있었다. 그 숫자는 1949년 94개소로 급격히 늘어난다. 그런데 공장 수는 늘었어도 품질은 그저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품질개선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구인회는 서울 장충동 집 마당을 일부 개조해 간이 건물을 짓고 연구소를 차렸다. 럭키화장품연구소가 탄생한 것이다.

 

기업 초기부터 연구소 개념과 그 역할을 알고, 혼의 경영에 나선 구인회는 마침내 동생인 구태회로 하여금 1949년 4월 투명 크림을 만들어 내도록 독려한다. 투명 크림의 제조 방법뿐만 아니라, 지방산에서 크림 원료를 추출하는 방법과 크림이 피부에 잘 번지도록 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일대 기술 혁신이었다. 핵심 기술인 이 기술을 얻기 위해 구태회는 집의 뒤뜰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베이클라이트 등 원료를 녹이면서 수없이 실험을 되풀이 했다. 그 결과, 남다른 차별적 경쟁력을 지닌 럭키 크림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구인회의 명확한 목표는 미약하기만 한 국내 수준의 화장품 제조 기술이 아니었다. 그는 일제 크림에 버금가는 화장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원료 품질에 관심을 기울였다. 품질이 떨어지는 마카오 향료에서 감신양행의 향료를 직수입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이 새로운 원료 루트를 뚫음으로써 구인회는 제품 품질 개선은 물론, 원료 유통 상의 혁신도 아울러 확보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소규모 기업에 불과한 럭키화학이 직수입을 모색했다는 것은 대단히 진취적인 일이자 동시에 무모한 일이기도 했다. 구인회가 지닌 이 혁신적 사고는 결국 가격은 더 싸면서 품질은 더 월등한 향료를 수입하는 길을 트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공장에서 밤새 만들어진 물건은 아침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떼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혁신 수행 과정에서 구인회는 남다른 큰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남이 하지 않는 일, 남보다 더 잘하는 일로 소비자에게 다가갈 때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플라스틱에 뛰어들 때에도 그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나는 결심했다. 이런 사업이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이다."

 

구인회는 왜 화장품 제조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전혀 다른 업종인 플라스틱 사출업에 올인 하듯 뛰어들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깨지지 않는 뚜껑'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플라스틱이 여러 분야에 응용될 거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업의 확장성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다. 이런 후진국에서 플라스틱은 장차 필수불가결한 제품이 될 수 있었다. 대체자원 효과를 이끌어 낼 여지가 충분히 있는 분야였다. 플라스틱은 생산원가나 품질이 타 원료대비 뛰어나다. 이런 장점이 크게 작용했고 무엇보다도 전국적 시장을 겨냥한 상업성이 높았다. 말하자면, 주력 산업으로 띄우기에 손색없는 신수종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혼을 불사르는 혁신적 사고가 있었기에 락희는 수없는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고, 이를 확대재생산해 내며 그룹의 면모를 획기적으로 갖추어 나간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