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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구씨이야기 허씨이야기(동반성장)

구인회의 복사판, LG의 '리틀 창업자들'

구인회의 복사판, LG의 '리틀 창업자들'

 

『서유기』에는 불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삼장법사의 제자 중 하나로 손오공이 나온다. 손오공은 위기 시마다 털을 뽑아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며 위기를 극복해 낸다. 구인회는 그룹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 같은 분신들을 만들어 냈다. 창업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창업 동지, 동업자들은 구인회식 경영을 위해 매진했다. 모두가 일체감으로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기업가 구인회는 특정 작업현장 한 곳에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장은 그의 분신들이 뛰는 모든 현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구씨ㆍ허씨의 앙상블로 함께 뛴 초창기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 구씨들

 

첫째 동생 구철회는 구인회와 동업으로 ‘구인회상점’을 창업한 공동 창업자이자, 동업자였다. 그는 형과 함께 그룹의 모든 사업을 일구며 훗날 락희화학, 금성사 등의 사장을 맡았다.

 

둘째 동생 구정회는 경성전기학교를 마치고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구인회 회장이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 화장품 기술자 김준환을 영입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 만든 화장품 이름을 ‘럭키(LUCKY)’라고 지어 ‘럭키그룹’의 기반을 닦은 사람도 그였다.

 

셋째 동생 구태회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면서 창신동 집에서 ‘화장품연구’에 몰입하여 ‘투명크림’의 개발 성공을 이끌었다. 그는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락희화학의 전무로 입사하여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에 목말라하던 구인회를 도와 LG가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1953년 락희화학이 서울에 사무소를 낼 때 기반을 닦은 이도 그였다. 사업을 하던 그는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후보로 고향인 진양에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넷째 동생 구평회는 서울대 문리대를 나와 락희화학 지배인 시절인 1954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청년회의소 총회에 참석한 뒤 곧바로 뉴욕으로 날아가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는 공을 세운다. 이 치약 사업은 훗날 럭키가 재계의 정상이 되는 결정적인 아이템이 된다. 공전의 히트를 친 ‘훌라후프’도 그의 제안으로 들여 온 것이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부정축재 기업인’ 처벌 때에는 형을 대신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가 아버지와 형인 이맹희를 대신해 처벌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구인회의 맏아들 구자경은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세계판매 1위를 달리고 있는 LG전자 에어컨은 구자경 회장이 락희화학 전무시절 “고층빌딩이 계속 늘고 있어 앞으로 에어컨이 필요해질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다. LG는 1967년 9월 미국 GE와 제휴해 국내에서 첫 에어컨 생산에 들어갔다. 구자경의 판단은 평소 구인회의 사업 지론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강조해 왔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남이 안하는 것을,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개발하여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인회의 넷째 아들 구자두는 미국 워시본대와 뉴욕시립대 대학원을 나와 금성사 관리부장 시절인 1962년 동남아 통상사절단을 수행하며 홍콩의 바노사로부터 라디오 200대를 주문 받아오는 등 LG의 첫 수출 물꼬를 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럭키치약 광고판을 부산 연지동 공장에 세우는 등 본격적인 광고개념을 도입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 허씨들

 

구씨들이 이렇게 맹활약할 때 허씨들은 어땠을까? 벤처투자가 허만정은 슬하에 8형제를 두었는데 허학구, 허준구, 허신구는 LG에 뛰어든 반면, 장남 허정구는 삼성 이병철의 ‘창업동지’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46년 1월, 구씨ㆍ허씨 최초 결합시기에 24살의 새파란 나이로 구인회와 대면한 허준구는 훗날 LG건설, LG전선 회장 및 그룹 부회장을 지내며 LG의 산역사와 함께하는 주역이 된다. 창업 제1등 공신이자 오늘날 LG를 만든 창업 주역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된다.

 

넷째 아들 허신구는 욱일승천하듯 뻗어 나가는 락희에서 금성사 사장, 그룹 부회장, 럭키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했고, 락희화학의 4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1974년에 통일된 그룹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상호를 '주식회사 럭키'로 변경한다. 이는 소비자 친화력을 높이고자 한 전략적 반영이었다. 그는 ‘조선통운’에 다니다 구인회의 영입에 응해, 락희유지 상무시절인 1962년 동남아출장에서 ‘합성세제’를 처음보고 세제 사업 진출을 건의하여 1966년 ‘하이타이’가 출범의 일등공신이 된다.

 

1980년대 들어 허씨들의 진출을 보면, 3남 허준구(금성전선 사장), 4남 허신구(금성사 사장) 등이 두각을 나타낸다. 막내 허승조는 럭키금성 임원을 지낸다. 그 외에도 허창수 GS그룹 회장, 허정수 GS네오텍(전 LG기공) 사장, 허진수 GS칼텍스 부사장, 허명수 GS건설 부사장, 허태수 GS홈쇼핑 부사장 등이 LG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LG는 그동안 숱한 계열분리를 통해 친족 간 재산분배를 마무리 지은 끝에 현재 LG에 남아있는 ‘오너일가’는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 상당수가 구씨ㆍ허씨일 정도로 가족경영이 활발했다. 오너일가들이 지나치게 많아 부작용도 많았지만 창업과정에서 이들의 공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구인회가 기업과 가족관계를 세움에 있어 전 가족의 기업 공유개념을 세우고 지킨 이유는 방대한 내외부의 '대가족'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업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합치고 끌어 모아 보다 빠른 궤도 진입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작은 성취보다는 나눔으로써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한 구인회식의 "주면 얻는다."는 발상이 가족 선단을 이룬 배경이다. 이들의 단합된 힘은 럭희와 경쟁하려는 군소 단위의 독립적 기업들과는 전략이나 성장 속도 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후대로 접어들며 LG는 수많은 정관계 혼맥으로 부와 권력 세습의 재벌 기업이라는 질타를 받곤 하지만, 초창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산업의 개척자들이자 구인회를 복제한 리틀 창업자들이었다. 그들의 공로 또한 쉽게 잊혀질 수 없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