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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굳은 맹세로 한결같이 신념에 복무하다

by 전경일 2014. 10. 21.

굳은 맹세로 한결같이 신념에 복무하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신념을 갖고 있다. 신념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중추이자, 삶의 뿌리를 이룬다. 나아가 대외 활동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곧추 세우는 기준이 된다. 나약한 신념은 쉽게 타협하고, 자기 존재를 잊게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경영자들의 굳은 신념은 든든한 닻이 되어 아무리 파도쳐도 끄덕 않는다. 장군을 만나러 가며 되새기는 질문이 있다.

이순신적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순신의 힘은 굳은 신념이고, 그 신념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어우러지는 리더십의 원형을 이룬다. 장군은 자신과 병사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졌고, 나라를 구하려는 자기 신념의 실천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관이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당시 무관보다 훨씬 선호되었던 문관의 길 대신, 장군은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무관의 길을 택했다.

무관이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순탄치 않다. 시험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낮은 점수를 기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연습을 계속한 끝에 결국 시험에 통과했고, 하위 무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즘 기업 직책으로 말하자면, 첫 시작은 사원급이었다. 그의 나이 이미 30대에 접어든 때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근무를 전전해야 했지만, 불평하거나 나라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잊은 적이 없다. 장군의 신념의 최전선은 늘 충()을 이루려는 자신에 있었다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하는 이순신의 모습.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서도 의연히 시험을 마친 청년 이순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구경꾼들은 그런 장군의 모습을 합격한 이보다 더 유심히 살펴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현충사에 전시중인 십경도 중 한 장면이다.

    

 

신념의 한결주의원칙

 

무관의 삶을 시작했지만, 일련의 재배치와 진급, 강등이 이어졌다. 이때마다 실망할 만도 했지만, 인내심이 흔들린 적은 없다.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조국에 대한 헌신이 꺾인 적도 없다. 조정은 전란을 야기한 무리들의 소굴이었지만, 한 치의 뼈저린 반성도 없었다. 그것은 국왕인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리더십이 의문에 붙여졌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체화된 수신 철학과 확고한 믿음으로 민족사의 희망의 등불을 치켜들었다. 이순신 없었더라면 임진 전란시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순신이 지닌 한결같은 의지와 수신의 자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임란 극복의 중추가 된 그의 신념을 일컬어 애국의 한결주의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훗날 이순신을 고찰한 시인 노산 이은상은 이순신의 진면목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위대한 인격을 완성한 분이자, 우리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살아 움직이고 실천되어야 할 지도자 정신을 가진 분이다.

 

장군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평은 없을 것이다. 공직 앞에 개인적 수신과 수양의 철학이 밑받침 됐다. 장군의 일생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노산의 이런 정의에 동의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신념을 구체화하고 현재화하는 작업을 평생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저 노량의 칠흑 바다에서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다. 국가와 민족 앞에 멸사봉공하는 삶을 살고자 철저했다. 리더십이 넘치는 시대, 이순신의 현현하는 모습은 신념을 이룩하고자 하는 많은 경영자들의 맹세와 함께 한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분투어린 자기 혁신과 인간됨의 수신에서 나온다. 나는 장군의 진실됨과 진중함의 모습과 만나며 가벼운 세태를 닮아가는 경영자로 내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전쟁은 온통 죽음의 천지였다. 적들의 소행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만행의 짓이었다. 그 앞에 통분하지 않을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 예로 임진왜란 때 종군한 일본 중 케이넨(慶念)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 왜적의 만행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지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눈에 비치고 있는 일들을 후세 사람들은 꿈에서 조차 모르고 지나게 되리라.

 

왜적들은 조선인 포로들을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매어 무거운 짐을 싣고 끌게 하고, 본 진영에 도착하면 전혀 쓸모없는 소는 필요 없다며 곧 바로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먹어치워 버리기까지 했다. 또한 굶주려서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굶주린 백성들이 그 고기를 먹기까지(人相食)”했다.(연려실기술17난중시사총록) 전란으로 인한 비참함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파리가 다리를 부비는 까닭은 왜적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비는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겠는가. 민간에 퍼진 이런 속언은 왜적에 대한 극도의 저항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이순신의 통분함은 조선 백성의 원한을 갚는 일이자, 인간다움을 올곧게 회복하는 인권 투쟁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뼛속에 맺혀,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왜적 앞의 이 같은 맹세는 장군만의 결의가 아니었다. 조선 백성 누구나 한으로 삼은 맹세였다. 그만큼 왜적의 만행은 짐승의 짓, 그 자체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에 와 있던 예수선교회 일원 중 스페인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에서 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방인이었다. 그는 임란에 임하는 조선인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꼬라이인(조선인)들은 결코 신하로서 굴복하여 지지 않았으며, 힘으로 만은 절대 꼬라이인들을 억수를 수가 없었다.

 

서구인의 눈으로 바라본 바도 끝내 7년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귀결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전국 시대를 갓 지난 일본의 무사집단은 조선은 물론 동북아 평화의 가장 큰 위험요소였다. 이런 일촉즉발의 위기에 이순신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온 몸으로 떨쳐 일어섰던 것이다.

경영이란 시장 내 정의로운 상행위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 인류 사회에 기여하고, 고용을 촉진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한 활동이다. 그것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다. 이순신 정신의 변함없는 한결주의를 볼 때마다 나는 경영자로서 내 자신의 책무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되새겨보게 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