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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광복 70 주년 8.15 특집] 일본 정한론(征韓論) 배경과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실천적 의미(3)

by 전경일 2015. 8. 5.

. 침략 논리의 전개과정과 영구황토화 계획설

 

일본은 유사 이래 주변국과들과 어떤 식으로든 침구를 통해 갈등을 빚어왔다. 그 갈등은 단기적으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일본의 불행으로 종결되고 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금 일본이 각국과 벌이는 영토 분쟁의 본질도 팽창주의적 갈등 국면을 지속시키려는 술책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달라지지 않고는 분쟁 국면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난망하다.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병탄은 물리력과 침략 사상 면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산을 물려받은 근대 왜구들의 준동으로 일어난 도발이었다. 일본 명치 정부 시기 한반도 침탈을 꾀한 일본이 내세운 정한론(征韓論)’의 배경도 연원을 따지고 보면 토요토미의 침략성과 연결된다. 일본 명치유신기 정한론의 근거라 할 일본의 대한(對韓) 인식은 다음과 같다. ,

 

·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야만국이다.

· 한국을 질책하여 조공을 받아들여 옛날 일본의 성세와 같이 해야 한다.

· 한국은 황국을 멸시한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 한국은 응신천황의 삼한정벌 이후로 일본의 속국이니 유신중흥의 세력을 이용하여 이를 정벌하

고 일본판도로 회복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정한론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그간 왜구식 침략 논리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키워왔다.

1823(순조 23) 일본의 사상가이자 토요토미의 열렬한 숭배자인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세계 만국 가운데서 황국[일본을 가리킴]이 공격해 가장 얻기 쉬운 땅은 중국의 만주 이상 쉬운 것이 없다··· 먼저 달단(韃靼, 몽고족의 한 갈래)을 얻고 난 후에는 조선, 중국도 잇따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사토는 한반도 동부를 공략하기 위해선 우선 울릉도와 독도를 먼저 치는 공략책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독도문제가 오늘 들어서만의 난동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다년(多年)의 공작(工作) 결과이자, 독도가 왜의 침략 목표이자 한반도 내륙을 치기 위한 거점으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인식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근대 들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방법은 임진왜란 때보다 한층 구체성을 띠고 있다. 이 같은 사토의 구상은 실제로 훗날 일본 명치정부 들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인천항을 열게 한 뒤, 원산항을 개항케 하는 조선공략책으로 그대로 쓰인다.

 

개항시기 서구화로 무장한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오로지 아시아 정복을 위한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인식만이 팽배했다. 사토가 말하는 우내혼동(宇內混同)’이란 세계통일을 말하는 것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팔굉일우2차 세계대전 전 일본의 국시(國是)였던 표어로 천하를 일가(一家)와 같이 한다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뿌리가 되는 침략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 토요토미의 침략사상을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계승해 더욱 구체화시킨 것이다.

 

사토의 대륙정책론’·‘남진론은 이후 일본 막부 말기의 사상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國臣)정만초책(征蠻礎策)’, 야마다 호고쿠(山田方谷)외정론(外征論)’, 가쓰 가이슈(勝海舟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되며 침략주의 사상으로 구체화되게 된다. 나아가 그의 사상은 일본 명치유신에 성공했던 문하생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져 특히 19세기 중반 열렬한 존황사상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의해 야마도 다마시이(大和魂)’로 이어진다. 요시다의 조선·만주공략론도 침략주의 면에서 사상적 배경은 이와 같다.

 

이처럼 한반도를 오랜 시간 침구했던 왜구의 본성이 근대 왜구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요시다는유실문고(幽室文庫)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끌어들여, 중국을 제압하()··· 토요토미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룸과 다름이 없다.

 

이런 주장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깊이 각인됐을 것은 자명하다. 요시다는 침략 방법론으로 사토가 제안한 울릉도·독도 공략책을 조선 침략의 가장 기묘한 책략으로 꼽고 있다. 그는 침구 이유를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잃은 부분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토요토미가 조선 전토를 다이묘(大名, 봉건영주)들에게 나누어 줄 시안(試案)까지 만들어 놓고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다. 이 같은 침략 근성이 근대 일본의 대()조선 침략책의 기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등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한반도 재침은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술하겠지만, 안중근의 의사에 의한 이토 격살은 침략의 원흉이자 거두를 제거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 사상의 승계를 끓어낸 것이었다. 더불어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세계 인민들에게 국제평화주의의 대선언을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일본 막부 말기의 사상가인 사무라이 히라노 구니오미는 일본 군국주의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조공회복론을 주장하며 먼저 삼한의 쳐서 다시 부()를 임나에 세울 것을 국방론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이처럼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 일본 중흥의 필수조건으로 인식한 근대 일본은 정한론을 조선 침략의 사상적 연료로 쓰고, 이의 실천을 끊임없이 모색해 왔다. 그 예로 1858년 이후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 정책을 추진해 온 일본 막부는 그 무렵, 조선을 (, 오랑캐)’라 칭하고, 서양 제국을 조약국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침략 의도를 사상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는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를 문명화로 위장하였듯 일본도 침략 행위를 문명의 이름으로 위장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 막부 말기의 고위관리였던 가쓰 가이슈에 의해 제창된 정한론1863818의견으로 상신돼 다음 해 33조선국정 탐색의 의()로 하달돼 실제 행동에 옮겨지게 된다. 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정한론1873(고종 10) 대원군의 강경 대일정책으로 조일교섭이 정체되자, 명치정부 내 조선출병론과 맞물려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쓰인다. 이 자는 다음과 같이 조선 침략의 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지금의 상태로는 공법상 밀어 붙이면 토벌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전부 이유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천하의 사람들은 아는 바가 없으면 모두 싸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조선이) 교린을 가벼이 한 행동을 책망하고 또 지금까지의 불손함을 바로하게 하고, (일본은) 기왕의 교린을 두텁게 하려는 뜻을 보인다는 구실로써 사절을 보내면, 반드시 그들이 경멸하는 대접을 해보일 뿐만 아니라 사절을 폭살하게 하는 행동을 틀림없이 할 것이다. 그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조선을) 토벌할만한 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원대한 전략이다. 물론 구정부[德川幕府]가 기회를 놓치고 무사함을 꾀하다가 마침내 천하를 잃었던 바 그 까닭에 대한 확증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다.

 

사이고의 주장 중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바깥으로 옮겨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발상은 작은 시비를 일으켜 끝내 전화(戰火)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오랜 왜구식 전략과 한 치도 차이가 없다.

일본 명치유신기 계몽주의 사상가를 대표하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친정(親征)준비는 어떠한가?라는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망발을 일삼았다.

 

만약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그때에 이르러 우리들 신하의 충정으로써 외람되게도 (천황의) 친정을 기원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오라, 비단 깃발이 한번 나부끼면 군사의 사기가 백배하여 국가존망의 갈림길인 군에 있어서 필승의 승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반개국 상태로 인식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내가 조선을 보건대, 예전의 우수했던 병비(兵備)가 지금 허술한 것이 아니다. 예전의 활발했던 사고가 지금 완고한 것이 아니다. 예전의 고상했던 풍속이 지금 비속해진 것이 아니다. 예전의 부강했던 모습이 지금 빈약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옛것들이 변하지 않은 것뿐이다. 따라서 조선은 퇴보한 것이 아니라 정체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과 조선을 뒤떨어진 후진국으로 보고, 조선에 대한 점령과 보호야말로 조선인민의 행복이라는 식의 후쿠자와의 주장은 조선지배론의 배경이 된다. 잦은 왜구 침구과 왜구적 침략 근성을 제국주의의 연료로 삼은 일본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구한말 우리의 내정이 흔들리는 틈을 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런 근대 일본의 오랜 약탈 전쟁과 더불어 근현대사에 우리가 접하게 되는 일본 정한론의 또 다른 주장이 당시일본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이른바 경성천도론(京城遷都論)’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책으로 제시된 경성천도론은 한반도에서 조선인 700만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일본인 700만명을 이주시켜 영구 지배코자 기획된 것이었다. 도요가와는 경성천도의 이유로 극동 시대에 도쿄는 지리적으로 치우쳐 있어 대도쿄(大東京)’을 주장할수록 소일본(小日本)’이 될 뿐이라며 경성으로 수도를 이전할 때라야 만주까지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극동은 자연스런 자급권자위권문화권이며, 조선반도는 이러한 극동의 통합지점이자, 일본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라고도 망발했다. 사진은 도요가와 젠요의 <경성천도론>(왼쪽))과 일제의 경성천도를 위한 교통로 계획도(가운데), 일제의 대륙 침략을 선전하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만철 광고(오른쪽))

 

1931년 만주 침공 후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 도요가와 젠요(豊川善曄)는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인근에 흥아학원(興亜学院)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경성천도론(京城遷都論)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본의 생명선 확보를 늦추지 않고 대륙경영에 나서야 한다면서 런던처럼 제국의 수도를 섬에 편향되게 둘 것이 아니라, 대륙에 맞닿는 경성으로 옮겨, “일만(日滿) 통제 공작에 화룡점정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성천도론에서 이 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향점을 섬나라 일본보다 대륙의 일본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대아세아연맹(大亞細亞聯盟)’의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촉구하였다.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일제의 침략논리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자료로 일본은 수도를 한반도로 옮김으로써 한반도를 영구 지배코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은 정한론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는 21세기 들어 현 일본 극우 집단에 계승돼 한반도 침략을 위한 사상으로 맹렬하게 광염을 뿜어내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