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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광복 70 주년 8.15 특집] 일본 정한론(征韓論) 배경과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실천적 의미(5)

by 전경일 2015. 8. 7.

최근 일본 극우주의 경향과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의 현재적 의미와 실천적 과제

 

. 안중근 의사의 동화평화론 개괄과 의미

 

잘 알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저격한 후 러시아 경찰에 의해 일경에 넘겨져 여순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순국하기 1주일 전부터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 논문의 서와, 전감의 일부만 끝내고 현상, 복선, 문답은 탈고를 하지 못한 채 안의사는 일제가 약속을 어기고 사형을 집행하자 순국하게 된다.

 

이 동양평화론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서양의 침략과 수탈의 국제 정세 속에서 동양제국이 생존권을 보존키 위해 공동 대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안의사는 서문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을 하얼빈에서 거행하고 동양평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전감에서는 (1) 청일전쟁의 원인과 일본의 승리 및 청의 패배, (2)제정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과실, (3)러일전쟁의 원인, 서구열강의 대책, 한국·청국의 대응, (4) 러일전쟁의 조약 체결, (5)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에 대한 경종의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동양평화론은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 극동의 분쟁지인 요동반도의 여순을 한··3국이 공동 관리하는 영세 중립지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양인들끼리 서로 침탈하는 행위를 중지하고 서양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동양 3국이 함께 번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의사가 주장하였던 동양평화론의 대계는 무엇인가?

 

1.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旅順)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2. 한 중 일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여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돕고

3. 동북아 공동 안보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할 것과

4.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처럼 안의사는 동아시아 평화·경제 공동체를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동양평화론은 20세기 초 동양 대세의 관계와 평화 정략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일이 각기 독립을 견지하고 서로 협력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공동 대처하자는 이론인 것이다. 그렇다면 안의사는 왜 재판 중 이 같은 평화 방책을 기술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국제 재판의 장을 이용해 일본의 대륙 침략 노선을 동아시아 공동체의 형성으로 전환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동양평화의 파괴범이자 저해요인인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을 고발하며 처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적 살해가 아닌, 국제법에 입각한 전쟁행위의 일환으로 거사를 치룬 것이다.

 

이 점은 안의사의 주장에서 잘 읽힌다. ,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에 있기 때문에 이등을 죽인 것도 결코 사원(私怨)으로 죽인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아직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등을 죽였다 해서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만일 일이 그렇게 급하지 않았던들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고 또 내게 병력이 있었던들 대마도 연해로 출병하여 이등이 타고 온 배를 뒤집어 엎었을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 세계 인식을 가져 온 당시의 여건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어난 의병운동에서 안중근의 독립전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 팽창 과정에서 5년 안으로 반드시 러시아·청국·미국의 3국 중의 어느 나라와 전쟁을 벌일 것이며, 이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것은 한국으로서는 큰 기회라 할 수 있다. 이때 만일 한국민에게 미리 준비가 없다면 일본이 패전해도 한국은 또 다시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며, 따라서 한국민은 오늘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스스로의 힘을 길러서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큰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다가 혹 패전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각국의 공론(公論)으로라도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안의사는 이같이 일본 팽창주의가 동양평화의 암적 존재임을 환기시키면서, 1차적인 일본의 희생자인 한국으로서는 그가 주장하는 독립전략으로 일제와 싸워 일제의 침략성을 세계에 알리고 동양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분단을 맞이하는 상황이 우리가 주도적으로 참전하지 못한 결과와 관련 있는 점을 볼 때, “스스로의 힘을 길러서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견고히하지 않을 때, “한국은 또 다시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안의사의 통찰은 새삼 오늘날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고 남음이 있다.

 

1907년 당시 안의사의 독립전쟁전략은 애국계몽운동파에 의해 검토는 되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의 의병운동은 현대 무기의 절대 부족과 의병들의 군사훈련 부족으로 패전을 각오하고 승전을 초월하여 전개되고 있었는데 비해, 애국계몽운동파들은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될 국권회복운동에서 실력을 배양하고 축적하여 최후의 승리를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안의사의 무력항쟁을 통한 독립만이 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야말로 변함없는 진리라는 점이다.

 

이 외에 안의사의 깊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료로는 안 의사가 1910217일 관동도독부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인 청취서(聽取書)’ 내용 중에 안 의사가 쓰고자했던 <동양평화론> 부분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1909116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하여 일본 외무성에서 정서하여 상부에 보고한 문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 안응칠 소회>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의례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라.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라.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이처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독립운동의 범세계성을 띤 사상적 체계로 안의사가 지닌 국제평화주의의 면을 보여준다. 이 점이 특히 우리로서는 작금의 일본 극우주의적 행태를 막고 국제 평화를 위해 안의사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계승해야할 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극우화가 극성을 피우는 시기, 일본이 잘못된 역사의 길로 들어서는 걸제어하고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실천할 오늘날 우리 과제는 무엇인가?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