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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by 전경일 2016. 1. 11.

돼지고기 도시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세상

 

미국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분업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도입된 때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였다. 이 제도는 식품 가공업에서 처음 나타났다. 식품 분야는 항상 정해진 작업이 명확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고, 원료 또한 작업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고 운반도 간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분업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원리 하에 생산된 최종 제품은 통일된 규격으로 일정한 용기에 담겨져 다음 공장으로 운반되었다. 부대에 든 밀가루나 쇠고기 통조림처럼 말이다.

 

이 획기적인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인 곳은 포코폴리스(‘돼지고기 도시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알려진 오하이오 주의 남서부 도시인 신시내티에 소재한 어느 돼지고기 출하 공장이었다. 1850년대 이 공장에서는 이동 크레인 원리를 이용해 돈육을 가공했는데, 실려 온 돼지는 도살되자마자 가죽이 벗겨지고, 천정에 매달린 레일의 컨베이어에 늘어진 고리에 가서 척 걸렸다. 곧 식용 돼지는 작업원에서 작업원으로 즉각 이동되며 해체되었고 내장은 제거되고 세척되어 검사를 마친 후 스탬프가 찍혀서는 냉동 창고에 던져졌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놀랍게도 불과 35초였다.

 

이 작업 광경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정원(庭園) 조성 기사도 있었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바로 그로, 그는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네 사람의 작업원 중 두 사람은 돼지를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돌리는 역할을 한다. 나머지 두 사람은 고기를 썰고 자르는 인간 기계로서 푸줏간의 칼을 무정한 톱니바퀴처럼 휘둘러 능률적으로 작업을 해치운다. 숙달된 솜씨로 돼지 다리, 어깨, 기타 각 부분을 자르고 다시 네모진 육편으로 썰어 삽시간에 운반차에 실어 제각기 목적지로 운반한다.”

 

한 마리의 돼지가 작업대 위에 올려 진 순간부터 다음 돼지가 올려 질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처음 잰 사람도 그였다. 이렇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공하는데 쓰인 돈육 크레인은 다른 식품업계에 전파되었고, 그 결과 업계는 판매 가격을 자연스럽게 인하할 수 있게 되었다. 혁신적인 시스템이 새로운 시장 판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같은 시스템은 통조림 생산에도 그대로 따라갔다. 그리하여 1890년 미주리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베스트는 통조림은 몇 년 전에는 고급 식품이었지만 지금은 가공되지 않은 음식보다 싸기 때문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라고 단언할 정도가 된다.

 

한 산업에서 검증된 효과는 즉각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이 시스템은 중공업 분야에 다시 파급되어 보다 체계적으로 작업원들의 활동을 관리해 나가는 데 쓰였다. 직공들은 인간의 스케줄이 아닌, 인류 최초로 기계의 스케줄에 맞춰 작업하게 되었다. 모든 불필요한 노력과 동작은 삭제되고, 보다 빠른 작업 방식만이 지속적으로 찾아졌다. 이런 급진적인 변화는 실은 과거에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절대불변의 원칙이 한순간 깨져나간 것이다.

 

효율성을 향한 경쟁 원리는 급격히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 곧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총화를 주창하는 인사들이 등장해 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제안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테일러 시스템의 고안자 프레더릭 W.테일러였다. 그는 스톱워치를 든 채 베들레헴 스틸 회사의 모든 공정을 면밀히 관찰하고는 분석했다. 그 결과 석탄을 취급하는 작업에서 셔블(삽이나 용기) 하나에 9.5킬로그램의 석탄이 담겨질 때 가장 작업능률이 높다는 점을 찾아내고는 회사의 모든 공원들에게 그 무게의 셔블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 프랭크 B. 길브레드와 릴리언 M. 길브레드 부처도 외과의사, 야구선수, 벽돌공 등을 대상으로 작업 중의 인간 구조, , 치수 등을 연구하여 가장 효과적인 작업 운동 방식을 찾아냈다. 그들은 실험대상자의 손에 광원(光源)을 달고 촬영한 사진에 나타난 빛의 이동을 바탕으로 철사줄 모형을 만들어, 실험대상자들이 자신의 운동을 연구하여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벽돌공의 경우에는 벽돌을 집어 올릴 때마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발견하고 편한 자세로 벽돌을 집을 수 있도록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작업대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자 하루에 1000개의 벽돌을 쌓던 벽돌공은 2700개나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고용자들은 이 같은 획기적인 생산 증대 방식에 열광했다. 이것은 대량생산 시대를 예고한 것이었다. 동시에 많이 만들면 싸진다는 신화가 고용자들 머릿속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검증된 시스템은 사람과 산업과 세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완전히 고정시켜 버렸다. 또한 모든 분야에서 일은 일방향성을 띠며 움직였다. 효율성을 향한 질주는 실용주의를 내세운 미국 사회에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곧이어 하나의 생산방식을 넘어 이제는 체제를 구축하는 보다 진보된 체계로 진척되어 갔다. 그 결정판이 그로부터 50~60년 후 마침내 현대 대량생산 기술의 비조(鼻祖)라 할 헨리 포드와 T형 자동차 공장이 등장한 것이다.

1850년대 이 미국발 열풍이 역사상 초유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그보다 88년이나 앞선 1762년에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교를 가설한 엔지니어 장 로돌프 페로네는 그 해에 래글에 있는 어느 평범한 놋쇠 핀을 만드는 공장의 모든 생산 절차를 분석해 냈다. 역사상 최초의 공업 분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노동 분담을 세밀히 조사했고, 작업 중인 노동자의 시간과 작업을 근대적 연구방법으로 면밀하게 분석했다. 핀대가리 제작 공정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한 사람이 1분간 20개의 핀 대가리를 굵은 것이든 가는 것이든 때려댈 수 있다. 핀 대가리 1개당 5~6회씩 때리므로 모루는 매분 100~120회의 타격을 받는 셈이다. 한 사람이 보통 한 시간에 1000개분, 따라서 하루에 1~12000개분의 핀 제조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런 관찰은 통찰력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담 스미스가국부론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패로네도 그대로 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 독립하여 작업을 하는 열 사람의 미숙련공은 각자 하루 한 개, 즉 전부 10개의 핀을 만들기 어렵지만, 열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한 공장에서 일을 분담하여 작업하면 48000개 이상의 핀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이미 이때 착안되었던 것이다. 이에 자본가이면서 고용주들은 또 다시 생산 증대 방안에 폭발적으로 열광했다.

그렇다면 이런 획기적인 공정은 이때가 처음이었을까? 그보다 오래 전에 생산을 획기적으로 올리려는 착상이 있었다. 르네상스 인간의 전형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낸 바늘 연마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공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159612일 이른 아침, 나는 다음과 같이 시산(試算)해 보았다. 한 시간에 400개의 100배가 되는 바늘을 처리할 수 있다면 매시 4만개, 12시간이면 48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만약 1000개에 5솔리드의 대금을 받는다면 400만개라면 2만 솔리드가 된다. 하루 일하는 몫이 1000리라라면 한 달에 20일을 일해서 1년이면 금화로 6만 더컷을 얻게 될 것이다.”

 

다빈치식 생각은 그 후 영국의 목사 윌리엄 리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16세기 말 매분마다 1000~1500코를 뜰 수 있는 편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손으로 뜨면 아무리 빠른 사람일지라도 매분 100코 정도가 고작일 때 이 기계는 몇 대에 걸쳐서 이어졌던 편물공들의 직업을 위협하며 바야흐로 기계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생산성 향상과 연계되어 이를 가속화 한 개념에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바로 부품이다. 부품이라는 생각은 생산 효율성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도 가져왔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동일한 규격의 부품은 호환성을 가져오며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제2요소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오늘날에도 강력한 하나의 생산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부품컨셉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1785, 프랑스의 총포공이었던 르블랑은 작업 과정을 견학하러 온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50자루분의 규격화된 소총 방아쇠 부품들을 분류하여 늘어놓고는 그 중에서 아무 부품이나 골라 맞추면 방아쇠가 조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퍼슨은 그 말대로 부품을 끼워 맞춰 방아쇠를 당겨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부품이 만들어 내는 이 획기적인 생산방식과 새로운 세계에 얼마나 놀랐는지는 본국에 있는 국무장관 존 제이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총 제작에 관해 이곳 프랑스에서는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의회에서도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며,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그 제조방법은 우선 완전히 동일한 부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부품은 다른 총에도 사용할 수 있다. 르블랑은 자신이 고안한 장치를 사용하여 그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이는 작업 과정을 단축하므로 소총을 보다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상을 했지만, 르블랑은 자신의 후원자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사람들의 관념 세계에 부품아이디어는 너무나 혁신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데 부품을 사용해 교환 가능하게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다. 신생 미국은 이 부품 원리가 지닌 가치를 재빠르게 눈치 채고는 생산 원리에 적용했다. 그 까닭은 부품 생산 아이디어는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신생 미국으로서는 그 같은 욕구가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차이가 유럽과 북미의 판도를 이후 완전히 바꿔 버렸다.

 

 

 

 

 

                  ()                                   (나)                         ()

() 20세기 이후 세계 공장의 대부분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포드식 이동 조립라인은 신시내티 돼지고기 출하 공장에서 고기를 절단하고 포장하는 조립 라인 운영 방식에서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얻어진 것이다. 19C에 미국인들의 왕성한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육을 처리해 대량 출하하는 전 과정에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착안되었고, 엄청난 생산 증대를 가져왔다. 위 그림은 돼지가 매달려서 이동하는 동안에 내장이 제거되고 세척되는 모습이다. 1850년에 돼지고기 출하업은 이미 큰 사업이었다. 1873하퍼즈 위클리지에 이 그림이 게재되었을 때, 당시 발전된 공장에서는 하루 평균 1500마리의 돼지를 처리하는 데에 150명이 종사하였고, 전국 연간 출하량은 약550만 마리에 달했다. ()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컨베이어벨트의 최초 적용 예는 수송 띠로 1890년 철도용 브레이크에 쓰이는 소형 주물을 제조하였던 피츠버그의 웨스팅하우스 주물공장에서 사용되었다. 당시 잡지에 게재되었던 목판화 속 띠는 연속되는 평면을 만들기 위해 서로 연결된 테이블을 써서 바퀴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주조, 주형, 기타 각 부문을 통과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포드는 이 주물 공장의 작업 방식을 포드 시스템으로 끌어왔다. 이것은 포드가 모든 산업지식을 끌어 모아 새로운 산업 방식을 창안해 낸 것을 뜻한다. () 포드 생산 공정의 최종 단계는 공장 밖에 자리 잡았다. 이 점은 추론컨대, 그가 의도하였던 자본주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예측케 한다. Source: Images from Time-Life collections.

 

오늘날 전 세계 공장에서 작동되고 있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역사적인 1913년 하일랜드 파크의 헨리 포드 자동차공장에서 시현된 것이다. ‘주물의 찰리라고 불렸던 찰스 E.소렌슨과 그 밖의 생산 분야 사람들의 협력으로 포드는 마침내 이 혁신적인 방식을 현대 시스템으로 완성해 낼 수 있었고, ‘자동차의 마법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가 만든 T형 자동차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규격이 통일되고 교환 가능한 5000여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검정 단색의 자동차였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를 생산하고, 생산 라인을 컨베이어벨트로 자동화 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진면목은 다른 데 있다. 자동차 보다 더 큰 세계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운영한지 얼마 안 되어 시스템 운영 제1원칙을 세웠다.

 

작업에 사람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작업을 할당한다.”

 

이것은 포드 자동차 생산라인의 제1원칙이면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가속케 한 제1원칙이었다. 바야흐로 인간이 노동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로 급전환된 것이다.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포드 이전에 사람들이 가졌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서 일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져 다 줄 것인가?’하는 식으로 문제를 뒤집어 보는 참신한 발상이 포드의 일관 작업(assembly line)’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 전환이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 면은 있지만 그 후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게 만든 면도 아울러 지적해야만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 바뀐 이상, 사람들의 인식, 사상, 정치·경제, 문화 및 행동 양태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완전한 시스템의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포드는 테일러나 길브레드 같은 초기 선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두 가지 능률적인 공정 기초를 확립해 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 한 단계 이상의 작업은 시키지 않는다였다. 한 사람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작업을 맡아 하는 방식은 폐기되고, 전 공정은 29개 작업 단계로 쪼개졌다. 그러자 한 개의 자석발전기를 만드는데 20분이 소요되던 것이 이제는 자동차 조립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1310초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 요소는 노동자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자세를 되도록 취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조립 부품이 지나가는 벨트의 높이를 20센티미터 가량 높인 것은 작업 소요시간을 7분으로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벨트 이동 속도를 조정해 작업 속도를 5분 이내로 단축하게 했다. 새시 조립 작업은 이 두 가지 방식을 결합한 것이다. 한 군데에 놓아둔 채 작업 하면 12시간 28분이 걸리던 것이 새시를 허리 높이로 올려놓고 적절한 속도로 조립공 사이를 기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조립 시간은 1시간 33분까지 줄어들었다. 더불어 벨트 작동 시간도 엄격히 관리해 45개의 부문을 매분 1.8미터의 속도로 통과하도록 조정했다. 그는 이런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공원은 4개의 흙받이를 새시 틀에 부착한다. 모터는 10번째의 작업에서 다루어진다. 부품을 집어 놓기만 하고 조립은 하지 않는 작업원도 있다. 볼트는 끼우지만 너트를 끼우지 않는 공원도 있으며, 너트는 끼우지만 그것을 조이지 않는 공원도 있다. 34번째 작업 단계에서는 거의 모습이 갖추어진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다. 그리고 45번째의 작업 단계를 거치고 나면, 자동차는 거리로 달려 나가게끔 되어 있다.”

 

이처럼 혁신적인 포드 방식으로 길거리로 뛰쳐나온 자동차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1911~1912년 사이 78400대였던 생산 대수는 1916~1917년에는 785432대로 급증했다. 그에 따라 T형 차의 가격도 690달러에서 360달러로 47퍼센트나 인하되었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당시 포드와 새로운 자동차 수요자들이 이 방식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누구도 이 방식에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동차 생산 방식을 넘어 점차 모든 산업과 미국 사회를 지배했고, 지난 세기와 금세기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주요 원리가 되었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그 사상과 결부된 체제 이상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체제를 이뤄낸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세상에 열광했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두 가지, 즉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켜보자.

 

하나는 1913년경 포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드가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것이다. 1913년 당시, 이 경이로운 맹활약을 펼친 포드 자동차의 생산 공정에서 최종 단계가 수행된 곳은 뜻밖에도 공장 밖이었다.

 

포드는 왜 마지막 단계를 공장 밖에 두도록 설계한 것일까? 그것은 외견상 자동차 출하를 염두에 둔 것임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일 것이다. 사진()에서처럼 경사판을 미끄러져 내려간 T형 자동차 차체는 아래쪽에서 나오는 완성된 새시 위로 떨어졌고, 곧바로 조립되어 출하될 수 있게 고안되었다.

 

포드가 공장 밖에 최종 단계를 둔 것은 이제 막 출하되어 나오는 자동차를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세기의 생산물을 쉴 새 없이 보게 함으로써 소비 욕망을 자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철저히 의도된 마케팅 일환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다 일까? 여기엔 보다 근본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이미 생산 방식을 넘어 사회 체제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포디즘(Fordism)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 자동차를 타기 싫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만드는 풍요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거요.”

 

일테면 이런 식의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공고화된 이념을 만들어 내고 이를 프로파겐다 한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20세기에서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자본주의 여정 동안 포디즘이 함의하고 있는 모든 성과와 그 이면의 모든 것들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갈등의 근간이 되고 있다. 지구상 대부분 인간들이 하나의 부품으로써 자기 앞에 밀려오는 수많은 부품들을 다루기 위해 매일같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세운 체제의 부품이 되어 버린 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일에 다가갈 수 있는 선택상의 자유는 박탈당하고, 일이 내게 던져진 순간부터 이 역전된 기현상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세우고자 한다면, 공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제대로 간파할 줄 알아야 하고, 모순 자체를 각성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장 밖에 서성이는 자들은 헨리 포드와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소비자들, 실업자들, 세리(稅吏), 허리 휜 가장의 임금을 기다리는 초조한 서민 등 모든 자들이 있다. 포드를 옹호하려는 자들 밖에서 한 끼의 밥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한 점검에의 의지다. 100년은 검증의 시간으론 이미 충분하다. 우리는 보다 나은 시스템에 대해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