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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일상의 암묵적 지식이 세상을 구한다

by 전경일 2016. 11. 10.

일상의 암묵적 지식이 세상을 구한다

 

세상의 지식에는 각기 쓰임이 있다. 어떤 지식은 전문지식인 영역일 만큼 특정분야를 꿰는 것이지만, 대부분 지식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다. 이런 자그마한 지식은 간과하기 쉬우나 때로는 인명을 구하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이를 무시했을 때의 대가도 톡톡히 치러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일상의 암묵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2004년 인도네시아 북 수마트라 서쪽에 지진이 일면서 초대형 쓰나미가 몰아닥쳤을 때와 1980년의 세인트 헬렌즈 산 폭발, 그리고 2011년 쓰나미가 몰아치고 난 뒤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났을 때 그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오스트레일리아 아보리진 사냥꾼들이나, 아프리카 부시맨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민간 지식이 위기의 순간 빛을 발한 것이다.

 

그날, 규모 9의 지진은 8분 동안 격렬하게 해저를 흔들어 댔다. 수마트라 일대는 곧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땅이 앞뒤로 흔들리고 엘리베이터 하강 가속도보다 훨씬 빠른 상하진동 때문에 사람이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피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해저가 갑자기 상승해 생긴 큰 파도는 항공기 속도인 시속 70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려와 15분 만에 해안에 도달했다. 5미터 높이의 파도는 수마트라 북부 반다아체 지역 25제곱킬로미터를 한순간에 덮쳐 버렸다. 이어 또 다른 24미터 높이의 파도가 내륙까지 침범해 1킬로미터 내 지역에 피해를 입혔고, 일부 지역은 8킬로미터까지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쓰나미는 상상할 수 없는 파괴의 흔적을 남기고는 물러갔다.

 

많은 사람들이 쓰나미가 물러가자 평온 상태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오였다. 이 같은 놀라운 대자연의 위기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십분 발휘한 사람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열 살 된 한 여자 어린이였다. 이 아이는 최근 수업시간에 배운 쓰나미 관련 지식을 즉각 떠올렸다.

“쓰나미는 썰물처럼 빠진 다음에 재차 더 강력하게 몰아친다!”

 

이 소녀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 해수가 밀려나간 것을 보고 즉시 주변 사람들에게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외쳤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어떤 운 좋은 사람들은 소녀의 말을 믿고 대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한 초등학생의 작은 지식과 기지가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이다.

 

다른 예로는 ⟪내셔널지오그래픽⟫지에서 쓰나미 특집을 읽었던 인도의 외딴 섬에 사는 한 부두 노동자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는 지진을 감지하고는 이웃들에게 큰 파도가 밀려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결국 이 두 사람은 1500명 이상의 목숨을 구해 냈다. 작은 지식과 용기를 낸 행동이 재난으로부터 귀중한 생명을 구해 낸 것이다.

 

화산 폭발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에서도 이런 일은 나타난다. 끔찍한 재난이 일어난 때는 1980년 봄이었다. 하지만 저 고약한 세인트 헬렌즈 산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는 시계 바늘을 약 2세기 전으로 돌려보아야만 한다. 이 이야기가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그 때로부터 175년 전인 1805년 11월이었다. 탐험가 윌리엄 클라크는 캐나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남북으로 뻗어 있는 1130킬로미터의 캐스케이드 산맥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한 이 멋진 봉우리를 발견했다.

 

이 우람한 산은 그 이전에 탐험가인 영국인 선장 조지 밴쿠버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때 탐험가들은 우연찮게도 클릭키타트 족 인디언들이 이 산에 대해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하나는 ‘루 위트’로, 그 뜻은 위대한 정령에 의해 아름다운 흰 산으로 모습이 바뀌어 버린 ‘사랑스런 소녀’를 의미했다. 인디언 전설의 어디쯤에 아마도 소녀는 아직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은 ‘타 원 라트 클라’로 ‘불의 산’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름은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첫 번째 이름보다 더 일상적으로 불렸다. 이 산은 이름에서 뭔가 불길한 징조가 느껴졌다. 더 분명한 점은 인디언들 자신도 이 산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행동에서 이 점은 나타났다. 인디언들은 주위의 삼림이나 하천에서 모피를 구할 짐승들과 식량용 물고기가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이 산에 접근하길 꺼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선조들로부터 들었던 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저 산은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나 불을 뿜으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부개척자들은 그 따위 말은 조금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산은 너무나 고요했고, 그 같은 징후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부개척자들이 그 같은 얘길 무시한 건 지구 역사로 따지자면 그리 오래지 않은 적에 일어난 몇 번의 격렬한 폭발 흔적을 침엽수림이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믿지 않으려는 회피 심리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인디언의 말은 그로부터 30년에서 50년 지난 1832년에서 1857년 사이에 사실로 드러난다. 세인트 헬렌즈 산이 서서히 깨어났던 것이다. 산은 간헐적으로 수증기와 화산재의 구름을 분출했고 용암을 토해냈다. 하지만 개척자들이 보기에 그 산은 아직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여전히 온건한 산에 불과했다. 그 사이 또다시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때쯤에는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고, 옛사람들이 남긴 충고도 완전히 잊힌 채였다.

 

100년간 잊혔던 악몽은 마침내 1980년 5월 18일 현실로 나타났다. 산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믿을 수 없을 만치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그 육중한 몸을 불쑥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 결과 한순간에 56명이 사망하고, 그 일대 6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일그러진 회색의 볼모지대로 순식간에 변모했다. 인디언들이 ‘불의 산’이라고 부른 그 본뜻이 궁극적으로 현실이 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가까운 불운의 사례는 일본에서도 찾아진다. 일본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쓰나미와 함께 초대형 재해를 일으킨 지난 2011년 3월, 이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한 달 여 지난 4월 20일자《뉴욕타임스》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일본 이와테현 등 동북부 해안에 쓰나미 위험을 적어놓은 비석이 수백 기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석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을 뚜렷이 새겨 넣고 있었다.

 

“이 비석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마라.”

 

그 운명적인 날, 이와테현 미야코(宮古)시의 아네요시(姉吉) 마을에는 38.9미터로 치솟은 쓰나미가 덮쳤다. 쓰나미는 정확하게 이 비석에서 40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몰려왔다.

 

쓰나미 경고 비석 중에는 600년 넘은 것도 있다. 경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높이가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것도 있다. 이들 비석 가운데 하나인 아네요시 마을의 비석은 ‘집을 어느 높이에 지어야 하는지’ 적시한 거의 유일한 경우라 하겠다.

 

 

‘이 비석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쓰나미 경고석. 일본 아네요시 마을 주민들은 1896년 대지진 후 쓰나미가 몰아닥쳤을 때 2만2000명이 죽고 단지 2명의 주민만이 살아남았다. 1930년 쓰나미 때에는 단지 4명만이 살아남았다. 비석의 교훈을 잊고 해안으로 거주지를 넓혀 나간 결과는 참혹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2만9000명이 사망하고 실종되었다. 민간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산 충고를 무시한 결과였다. 작은 지식이나 전승 지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교훈이다. Source: New York Times(April 21, 2011.)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지진, 쓰나미가 일어나지만, 일본 기상청에서 이를 과학적으로 관측한 것은 불과 150년 정도밖에는 안 된다. 이 같은 현대의 과학적인 데이터보다 아네요시 마을의 비석처럼 전래되어 오는 역사는 더 많은 관측 자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기상청은 과학적으로 관측된 것이 아니라며 주목하지 않았고, 도시 건설로 수익을 맞추는 건설업자들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남쪽에는 후타바 단층이 있다. 이 지질대는 언제든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활(活)단층대다. 그럼에도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탐욕의 결과 지진에 취약한 지역에 세워졌고, 그것은 때만 기다리는 시한폭탄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원전 사태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일본에서 거대한 쓰나미를 일으키는 지진은 300년에서 500년마다 반복해서 일어난다. 짧은 인간사로 보면 앞서 다룬 세인트 헬렌즈 산의 경우처럼 너무나 먼 과거 일에 불과해 떠올릴 수도 없지만 자연의 시간으로는 극히 촌각에 불과하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2000년마다 한번 씩 화장을 고친다. 지표면의 변화가 서서히 일다가 이 주기로 표출되는 것이다. 후쿠시마 쓰나미는 바로 그런 예에 속한다. 이 뚜렷한 교훈을 잊고 만용을 부리다가는 언제고 피치 못하게 화를 입게 되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지식을 얘기 하나 정작 인간내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지식과 교훈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도 못하고 재앙이 닥치기 전까지는 별 관심도 없다. 작은 사고에 대한 대응에도 미숙하다. 독사에 물렸을 때의 대처법, 사막 여행을 갔다가 전갈에 물렸을 때의 치료법,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할 때의 말라리아 퇴치법, 아기 목구멍에 걸린 코르크 마개를 신속히 빼내는 법, 불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취해야 할 방법 등은 가장 중요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시절에나 잠깐 배우고 만다. 이 같은 지식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갑작스럽게 닥치는 위험 앞에서도 적절한 대응법을 알려주는 소중한 것들이다. 작아 보이지만, 생존에 필수적 지식이다.

 

죽음의 상황에 직면해서도 삶으로 이끄는 작은 지식들은 많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것보다는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다우지수가 국내 주가에 미치는 영향, 펀드 이익 계산법, 부동산 가치 변동 요인 등과 같은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런 지식은 경제인으로서는 필요한 것일 테지만, 이런 지식이 결정적으로 삶과 죽음을 나누지는 않는다. 물론 1929년 세계 공항 때처럼 주식 폭락으로 자살을 결심하는 극히 예외적인 사람들의 경우를 빼고는 말이다.

 

지식은 크든 작든 많은 경우 자신과 세상을 구하는 데 쓰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매우 작은 ‘소지소식(小知小識)’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지식이 실제로 인간사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연합군 비행기가 행방불명되는 일이 벌어졌다. 연합군 측은 비행기, 지프, 사냥개 등을 총동원해 며칠간 수색했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호주 원주민인 아보리진 사냥꾼들이 실종자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길을 잃어 헤매는 인간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에게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그것을 주의 깊게 조사해 흔적을 추적했다. 심지어 실종자가 발견되었을 때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쇠약해져 있는지, 절름발이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제정신인지 어떤지도 정확히 맞추었다. 오랜 시간 짐승 추적에서 배운 그들만의 숨은 지식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점은 아프리카 부시맨의 경우에도 같다. 엘리자베드 마아셜 토머스는 부시맨들과 2년간 같이 지낸 뒤 그의 경험을《천진난만한 사람들(The Harmless People)》이란 책에서 썼는데, 그는 사냥 나간 부시맨들이 상처 입은 영양을 4주간이나 뒤쫓는 광경을 보여준다. 영양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백 킬로미터라도 쫓겨 다닌다. 부시맨은 놀랄 정도로 관찰력이 예리하다. 그들은 지면이 아무리 말랐어도 자기가 손댄 영양의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으며, 같은 종류의 영양 무리의 발자국과 뒤섞여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서 자기가 손댄 영양 발자국을 찾아낼 수가 있다.

 

한번 발자국을 잃어버렸다가 뒤에 다시 찾을 때에도, 그 발자국이 자기가 찾는 영양의 것인지, 아닌지도 틀림없이 알아맞힌다. 어린애들까지도 초원에 어머니 발자국이 있으면 그것을 가리킬 수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예민한 눈으로 모래먼지 속에 숨어 있는 전갈도 찾아내어 밟지 않고 뛰어넘는다. 이 같은 암묵지는 아프리카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숨은 지식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위험은 사느냐 죽느냐 같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위험은 우리가 이를 무시함으로써 장차 다가올 더 큰 위험을 키우곤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모든 재앙이라고 불가항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불운한 사태는 피할 수 있다. 요는 이를 막으려는 수마트라 초등학생이나, 부두의 노동자, 인디언들, 쓰나미 경고석처럼 조짐을 일러주는 신호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거창한 지식보다 삶에 밀착된 자그마한 지식을 좀 더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 가장 큰 욕망을 머리를 위에 떠받들고 있는 특이 별종으로서 인간이란 종이 계속 지구상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말이다.

2014년 1월, 미국 시카코에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자 사람들은 흥미삼아 영화〈투머로우〉를 꺼내며 농담을 해댔다. 같은 시기 아르헨티나에서는 기온이 50도까지 치솟아 끊긴 전력난으로 시위가 잇달아 벌어졌다. 자연 현상과 그것이 찾아오는 주기는 인간의 바람과 전혀 상관없다. 자연은 인류의 지속적인 존속 여부에는 관심도 없다. 인간만이 인간과 자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사는 인간 중에는 같은 인간들에 전혀 관심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일수록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4년 4월 한국의 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우리는 그날 이후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백히 고지해야 한다.

 

‘어른들을 믿지 말 것.’

‘온갖 국가기관과 해당 조직에 소속된 자들이 하는 말을 믿지 말 것’

‘선장과 선원을 믿고 배를 타지 말 것’

‘앞으로는 절대 누구도 믿지 말 것, 그가 하는 말과 반대로 행동할 것. 특히 정부(유관 기관)가 하는 말일수록!’

 

이런 비극을 부른 근본적인 원인은 명명백백히 대한민국 정부와 지도층에 있다. 비극의 원천은 늘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재하고, 탐욕으로 얼룩진 그들에게 있다, 언제나 그렇고 늘 그래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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