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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삼국지에서 배우는 경영

가치를 높이는 브랜드 파워

by 전경일 2017. 10. 12.

스타벅스는 무엇을 팔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이 세계적인 기업을 바라보는 각도를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하나는 경영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측면이다. 하지만 잘 보면 이 두 가지 요소는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영적 사례로 스타벅스는 커피 소매를 재해석해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BM)을 창출해 냈고, 이후 수많은 ‘미투(me too)'를 만들어낸 오리지널티(orginality)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 측면은 어떨까? 그들은 눈에 보이는 커피 이상의 무언가를 팔고자 했다. ’문화‘ 즉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 기호, 유행, 친근감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그것. 어떤 점에서는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이런 점은 유형의 상품을 파는 것을 ‘상품’으로 인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과 차별화 되는 점이었다. 또한 다분히 ‘가치’를 재해석해 새로운 사업의 영역을 펼쳐 보였다. 그 영역은 감성 분야이며, 동시에 새로운 관점을 여는 인지 영역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스타벅스는 21세기적 가치가 반영된 기업의 전형으로 경영학이나 사회문화학 측면에서 검토된다.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자리 잡고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기다리다 보면 일견 문화가 보인다. 스타벅스는 알다시피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이탈리아 밀라노 커피바에 갔다가 겪은 ‘따뜻한 경험’이 무한 복제되어 만들어진 비즈니스 모델이다. 생활 속 작은 감각이 결과적으로 전 지구적 무한 감성 비지니스를 키워낸 셈이다.

 

지금은 음악이 다양해졌지만, 초기에 스타벅스에서는 창업자 하워드의 친구인 케니 지의 색소폰 연주곡이 왕왕 들려왔었다.

 

“여봐라, 친구가 창업했는데 내가 해줄 건 없고, 좋아! 내 음악을 무료로 틀게 해주지!” 프리캐스팅을 허용해 줬기 때문이다.

 

그때의 음악은 여느 커피점과 달리 일종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런 분위기는 시간이 누적되며 고객들의 경험 누적치가 되어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문화 창출-사업 연계의 선순환 구조에 올라탄 것이다.

 

원두를 매장에 전시하는 것도 문화적 요소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다. 원두를 맡다보면, 커피향에 사람들의 마음은 포근해지고 순화된다. 나아가서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마저 준다. 사랑받는다는 느낌, 배려 받는 듯한 느낌이 배어나오며 스타벅스가 만들어 내는 문화에 자신도 모르게 참여하게 된다.

 

게다가 수많은 원두커피와 이국적 이름의 브랜드들, 배리스타(Barista)의 언어나 재즈의 선율 등은 어떤 감각적 마케팅보다도 가장 먼저 다가오는 오감 마케팅의 전형을 이룬다. 하워드 슐츠가 이뤄낸 훌륭한 미케팅 포인트이자, 고객 소구점이 바로 이것. 이 점이 지금도 여전히 스타벅스의 가장 큰 자산에 해당된다.

 

이외에 또 있다. 스타벅스의 탁월성은 고객들의 시간을 재해석한 점이다. 커피를 마시려는 고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 기다리는 시간이 고객 불만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기다림이 즐거움으로 바뀐다면 고객 불만 요소는 사전에 차단되거나 제거된다.

 

스타벅스는 바로 이 기다림을 커피를 즐기는 과정으로 극적으로 전환시켜 냈고, 그 점이 가장 혁신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반대의 상극이 되는 요소를 극적인 고객 소구와 고객 만족 요소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시장 주도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동시에 이전에는 누구도 ‘가치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남다른 발견으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어떤 획기적인 브랜드 관리력 수준도 뛰어 넘는다.

 


경영은 끊임없이 고객의 인식과 행동 패턴에 도전하고, 고객을 끌어오려는 비즈니스 활동이다.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커피숍 업종에서 해 낸 ‘Good to great'의 경영이 이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신시장을 찾고자 하고,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내고자 하지만, 진정한 새로운 시장은 고객의 인지와 감성의 영역에 무한히 펼쳐져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러다보니 ’가치‘ 자체에 대해 경직된 사고를 취하기 쉽다. 시장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은 고객의 인지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기만 하면 새로운 브랜드가 서고, 시장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는 전부 ’me to'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도자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역사적으로는 《삼국지》가 펼쳐 보이는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해 자신만의 브랜드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은 새로운 시장 질서를 부여하려 한 것에 견주어 볼만 하다.

 

《삼국지》 의 핵심 주인공 중 한 명인 유비는 후한의 연수 4년(161년)에 하북성 탁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생 최대의 라이벌인 조조보다는 여섯 살 아래이다. 그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세는 곤궁하기만 했다. 짚신과 멍석을 짜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는 얘기는 그의 한미한 처지를 잘 드러낸 준다.

 

그런 중에도 유비에게는 커다란 장점이 있었으니 어머니를 지극지성으로 섬겨 효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점이다.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유비는 한실의 후손이라는 것에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강했다. 이 점은 그의 정체성과 브랜드 구축에 주요한 축을 이룬다.

 

유비의 출신 내막을 살펴보면 이렇다. 유비는 한나라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먼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점은 정확하게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평원현 지사 유평이다.

그는 “유비가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 전신은 보잘 것 없는 멍석 장수가 아니냐”고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변의 이런 평가에도 유비는 스스로 한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런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이 망해 가는 한실을 재건, 재흥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암시를 대내외적으로 심어준 것이다. 일종에 타고난 핏줄을 강조함으로써 남다른 초기 브랜드력을 강화한 것이다.

 

유비의 핏줄 강조는 대단한 홍보력을 발휘했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창업의 대업에 나서는데 대단히 큰 설득력을 지닌 것이었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흡인력의 원천이었으며,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두터운 진입장벽을 친 그만의 홍보 수단이었다.

 《삼국지》의 편자인 진수는 유비를 가리켜 “사람을 알고 선비를 기다리는 것이 한고조의 풍모가 엿 보인다”고 평했다. 한마디로 ‘홍의관후’했다는 얘기.

 

유비에 대한 평처럼 그는 알려진대로 침착하고 포용력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실 후손에 온화하고 후덕한 인품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었고, 인간미가 물씬 나게 했다.

 

유비의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는 어렸을 때의 일화로 더욱 구체화되어 가는데, 그 일화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유비의 집은 원래 탁현의 누상촌에 있었다. 집 앞 동남쪽에는 다섯 길이나 되는 커다란 뽕나무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뽕나무는 마치 수레 위에 받치는 양산인 차개와 같아 보였다.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던 점장이가 현덕의 집과 뽕나무를 유심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집에서는 필시 귀인이 태어나리라.”

 

이 말은 유비에게는 자기실현(self-actulization)적 예언이 된다. 유비는 이 뽕나무 밑에서 동리의 아이들과 놀면서 항시 이렇게 호언장담하곤 했다.

 

“나는 장차 이 나라 황제가 되어서 이 차개가 달린 수레를 타고야 말겠다!”

 

이 말을 유연히 들은 숙부 유원은 두려움도 들었지만, 장차 유비가 큰 인물이 될 거라는 걸 예견한다. 일테면 경영학적으로 ‘크고 섬뜩하고 대담한 목표(BHAGs : Big Hairy Audacious Goals)’를 보고 제시한 것이다. 이런 목표를 구체화 시키는 작업은 조만간 뒤따랐다.

 

15세 때 서울인 낙양으로 유학길을 떠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최초의 인맥이라 할 수 있는 근위군의 학문 교수를 하고 있던 노식을 만나 기초적인 유학과 병학을 배웠고, 동문으로 산서 군벌 자녀인 공손찬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인맥과 타고난 인간적 카리스마를 배경으로 후일 청년이 된 유비는 관우, 장비를 만나게 되고, 이런 관계력을 바탕으로 격랑의 시대에 세상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첫 전투로 여겨지는 싸움에서 유비는 단지 500여 명의 청년 병사들을 이끌고 뛰어들지만, 세력은 점차 넓어지고 조직화 되어 간다. 이어 500명의 군사로 5만의 홍건적 대군을 만나 적장을 벰으로써 승세를 잡고, 태수 유언을 도움으로써 초기 창업의 태동과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어 황건적에게 성이 포위된 청주 태수 공경을 구함으로써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한다. 일테면 브랜드력(力)을 갖추기 시작한 것.

 

유비의 초기 입지를 보면, 창업의 종자돈은 한실의 후예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한데서 나타난다. 이어 작은 성공을 거둠으로서 창업은 현실화되는 것이다. 브랜드의 힘, 그것은 유비가 만들어 낸 초기 창업의 가장 강력한 기반이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