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사보기고

명절 때 남편이 할 일_동아일보

by 전경일 2018. 9. 21.

오랫만에 지인을 만나 내가 예전에 쓴 기사 이야기를 했다. 명절 시즌이니 한번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올린다. 예전에 동알일보에 실린 기사다.

 

 

명절 때 남편이 할 일_동아일보

 

 

흠... 또 돌아왔군.

 

달력을 펴든 여자들이 한숨을 내려놓는 순간, 남자들은 왠지 모르게 비겁해지고 만다. 이럴 때 눈치 빠른 남편이라면, 더부살이하듯 아내 눈치를 살피며 요령껏 위기 순간을 넘길 필요가 있다. 게다가 푸념 뒤에 이어질 말이라곤 짐작컨대, '여자들 일'로 차례 준비를 치러온 그간의 고충이 불만으로 터져 나올게 분명하다. 명절 때나마 푹 쉬고 재충전하면 좋으련만, 전쟁 치르듯 보내야 하니, 게다가 남자들이란 도와준다고 해봐야 장보러 마트에 가주는 게 다고 생색만 낼 뿐이지 전 하나를 야물딱지게 붙이기라도 하나... 기껏 부침개 하나 붙이면서도 이것 가져달라 저것 가져와라, 남편들 시중드느니 차라리 여자들이 달라붙어 하는 편이 낫지. 차례 치르기도 전에 명절 신드롬에 빠지는 여자들 앞에서 철없는 남편들은 올핸 각성 좀 해야 할 성싶다.

 

게다가 연휴 때면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는다는 사람들도 적잖고, 고즈넉히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이 한껏 일기 마련이다. 그래서 질투가 난다. 명절 연휴를 여행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히 용기를 못 내서 그렇지 나의 바람이도 하다. 특히 맞벌이하는 여자들은 지레 명절 가위에 눌려 연휴보다 일하는 날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할 터.

 

명절 연휴가 올핸 짧아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얘기엔 틀림없이 노동의 불평등성이 작용할 터다. 더구나 다들 얇은 주머니 사정에 명절이 길기만 하면, 아무리 일가친척이 만나는 자리라도 서로 편할 리 없다.

 

명절 증후군은 이렇다 치고, 올 해도 나는 아내와 손도장을 찍었던 합의사항을 지켜야 할 것 같다. '명절맞이 3원칙'이 바로 그것. 우리 부부가 이런 원칙을 세운 것도 실은 명절 후유증 예방과 뒷탈 방지책이었다. 실은 나나 아내나 다들 명절 때가 아니면 친척들 얼굴도 보기 어려우니, 명절의 혜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요는 역할 불균형성이 가져오는 삐걱거림이 오랫동안 후폭풍으로 작용하기에 불필요한 갈등요인을 줄여보자는 데서 시작한 것이다.

 

자, 우리 부부가 합의한 사항은 크게 3가지.

 

▲첫째, 비교 말 것. 어느 집은 어떤데 우리는 어떻다는 식의 비교는 명절을 가장 짜증나게 한다. 아이들 성적이든, 애들 키든 비교하지 말자. 비교우위를 찾고자 하는 것만큼 어른으로서 작아 보이는 것도 없다. 게다가 부모의 이런 태도가 아이들한테 좋을리도 없고. 더구나 이렇게 비교를 하든, 당하고 나면 심란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설령 좀 나아보일지라도 그저 입을 꾹 다물면 다툴 일도 속을 볶을 일도 없다.

 

▲둘째, 부모님 얘기는 그 분을 얘기로 끝낼 것. 자식들 모이면 어른들 괜한 기대감에 어느 집은 어떻다 더라며 말을 떼기 일쑨데, 거기서 일정 거리를 유지할 것. 어른들 얘기 들을 때면 그만 못해서 속상하고, 못해드려서 마음 무겁고, 괜히 죄인된 듯한 느낌마저 들어 집에 돌아와서도 후유증으로 남는데 그걸 되풀이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러니 '명절 스토리'는 그날 그 장소에서 끝내고, 부모님께는 할 수 있는 일만 할 것.

 

▲셋째, 술상은 알아서 차릴 것. 여자들 음식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는데, 술상 심부름까지 시킨다면 곤란한 일. 평소엔 다이어트한다고 야단법석이더니 명절 무렵이면 술상 펴놓고 앉아서 퍼먹는 남자들 꼴이란! 명절 끝나면 이번엔 헬스장 끊을 건가. 그럴바엔 오랜만에 보는 집안 아이들 붙들고 생선도 쭉쭉 발라 밥 먹여 줘 보고, 학교 운동장이든 놀이터로 데리고 가서 마음껏 달리기 하고 철봉도 하게 하자. 아니면 가을 들판 길을 자전거로 씽씽 달리든지. TV에 디민 코는 당장 빼들고 애들과 힘껏 놀아줘 보라. 집안 아이들과도 친해질 거고, 여자들이 음식 만드는데 도와주지 않는다고 눈 흘기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다. 이런 게 다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자기 친정집에 가면 갑자기 돌변해 아내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도 못하는 남편이라면 곧 끝날 잔치 이후의 정국을 내다보시라. 그때까지 갈 것도 없다. 처갓집 가는 차 안에서부터 아주 길고 험한 가시밭길을 달려야 할 것이다.

 

행복한 명절은 부부가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는 것만이 아닌, 행동하는데서 시작한다. 물론 노동 평등성이 함께해야 한다. 그럴 때 귀경길도 편안하다.

 

남자들! 올 추석 땐 무거운 궁둥이 번쩍 들고 바삐 움직여 보시라.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애들 자랑, 회사에서 나 잘 나간다는 식의 얘기는 적당히 하시라. 남들도 비슷하기에 내 속내를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팁 하나! 만약 밥상머리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거든 딱 1절만 하시길. 다들 알지 않나? 결국 언성만 올라가고, 자칫하다간 체한다. 실속 없는 언성에 바쁜 여자들은 화만 난다. 대신, 적당히 화제 돌려 낮은 목소리로 서로 위해줄 수 있는 얘기로 명절 끝내기를 하시길. 남편들 친정 가는 길에 아내 마음 편하다면 해외에 나가진 못해도 나름 의미 있는 연휴가 될 테니까.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