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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46

구사협갈(驅使脅喝) 위협과 공갈로 광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구사협갈(驅使脅喝) 위협과 공갈로 광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1375년(우왕 원년) 5월 왜장 후지 쓰네미쓰(藤經光)는 부하들을 인솔해 쳐들어가겠다고 공갈하며 식량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해 식량을 주고 순천과 연기 등지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이 일은 결과적으로 왜구가 더욱 포악해 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 원인을《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세우의 명령으로 김선치(金先致)가 일본 해적 쓰네미쓰 무리를 유인해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난 뒤부터 왜구들이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침구시마다 더욱 광포하고 잔악하게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도 살상했다. 왜구는 한번 침구하면 인명을 남김없이 살해해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의 주군(州郡)은 텅 빈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고.. 2017. 8. 25.
침용소분(侵用消紛) 내외부 혼란을 통해 자국의 분란을 해소한다 침용소분(侵用消紛) 내외부 혼란을 통해 자국의 분란을 해소한다 1359년 고려에 침구한 왜구는 이 해 5월을 고비로 기세가 다소 수그러들었다. 왜구 발호로 국가적으로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은 고려로서는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휴식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여우를 피하자 범이 나타난다고 그 해 11월에 접어들자 고려는 또 하나의 외침 세력인 홍건적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게 된다. 이를 ‘제1차 홍건적의 난’과 이에 대응한 ‘홍건적 토벌전쟁’이라고 부른다. ‘북로(北虜)’로 말미암아 고려는 핍진한 군사력을 모아 홍건적 토벌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력이 북으로 향하자, 왜구는 이를 기화로 대거 침구를 감행해 온다. 왜(倭)로서는 고려의 국란은 간절히 바라던 바였고, 약탈의 절호의 기회였다. 고려가.. 2017. 8. 16.
왜구, 전쟁으로 전쟁을 말하다 왜구, 전쟁으로 전쟁을 말하다 고려와 조선을 연이어 붕괴시킬 버릴 정도로 극악스러웠던 왜구. 이 광포한 약탈․살인 집단은 우리에게는 일본이란 나라의 이미지와 그대로 클로우즈 업 된다. 900여회나 되는 국지전과 전면전을 치룬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왜구와 일본을 동일시하는 인식을 가져왔다. 오늘날 한․일 관계의 깊은 감정의 골도 여기에 뿌리를 둔다. 이 점은 한반도를 대상으로 일본이 지속적으로 야기한 침구가 원인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불편한 관계’라는 점에서 ‘일본 책임론’으로 귀결된다. 더불어 우리의 인식도 담금질될 필요가 있다. 왜(倭)를 심리적 혐오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자칫하다간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층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명분론처럼 ‘감정’에 치우칠 위험.. 2017. 8. 9.
여름 부채로 더위를 쫒는 법 여름 부채로 더위를 쫒는 법 “이 부채를 자네에게 주노니 여름 더위를 쫓게나.” 여름이 한창이다. 성하(盛夏), 농익을 때로 농익은 더위요, 푹푹 가마솥처럼 찔 때로 찌는 일기다. 이럴 때 두 발 풍덩 찬물에 담그고 수박을 먹으며 그간 못 읽은 책을 읽는다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 보단 부채를 부치다 지인이 써준 몇 글자를 탐미해 보는 건 어떤가? 내가 써주었던 그 부채들은 다들 어디에 갔나? 부채들이야 그렇다 치고, 먹물 짙게 배인 글들은 지금 어디선가 다른 이의 더위를 쫓고 있지 않을까? 그간 써준 글귀들을 떠올려보니, 감회가 자못 새롭다. 독성(獨醒) - 스스로 깨우치라는 뜻이다. 좌벽관도, 우벽관사(左壁觀圖, 右壁觀史) - 왼쪽 벽에서 그림을 보고, 오른쪽 벽에서 역사를 본다.. 2017. 7. 11.
고려·조선의 경우: 왜구는 한반도의 왕권을 두 번이나 바꿨다 고려·조선의 경우: 왜구는 한반도의 왕권을 두 번이나 바꿨다 우리 역사상 왜구의 침입이 가장 심했던 때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였다.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가장 심대하게 영향을 미친 외부 세력이 왜구일 정도다. 왜구의 잦은 출몰과 약탈로 지방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중앙정부의 무능력은 극에 달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1223년(고종 10년)부터였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간 529회 침입했다. 연평균 3회 이상 침입한 것이다. 침입지역도 해안과 내륙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226곳이 피해를 입었다. 왜구의 선단은 많을 때는 130척, 213척, 350척, 500척 등으로 규모가 컸고, 인원도 기병 700여명, 보병 2천여명.. 2017. 5. 25.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신라는 건국 이후 꾸준히 군사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왜구대책에 있어서 대체로 방어전술로 일관했다. 왜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295, 407년)에 걸쳐 왜구의 근거지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신라는 왜구의 침입이 있을 때면 ‘선수후공(先守後功)’의 전술, 즉 왜구가 철수할 때를 기다려 기습, 매복, 섬멸하는 작전으로 왜구를 퇴치했다. 토벌에 성공한 9개의 사례 중 한두 번의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방어 전략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나라 고대 시기에는 유독 신라만이 왜구의 침범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학관계가 크.. 2017.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