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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경력고원에서 생존하는 법

by 전경일 2009. 2. 3.
 
자신의 어느 한 가지 분야에만 집중해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생계를 해결해 가는 시대는 그나마 행복했다. 그 시기와 달리 경력의 집중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히 대두되며, 새로운 출구로 항해를 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는 사회의 도래는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수령이 되는 그 시기를 대체로 정보화와 산업화가 엊갈리고, 로컬(local)단위가 글로벌(global)로 전환되는 외환위기 전후로 본다.


개인의 경력 또한 시간과 경험이 쌓이며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이동할 수 있는 계기가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게 외환위기 이전의 직장·사회풍토였다. 이 시기의 정서는 다분히 가족적이었다. ‘가족’을 강조한 기업들의 캠페인은 이 시기 기업들의 주요 홍보 방식이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그룹들의 이름은 이 시기를 풍미하며 절정으로 치닫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공룡의 화석으로나 남아 있다.


물론 그 시기에도 능력에 의한 평가와 보상이 주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제가 부각되었다 하더라도 연공서열제가 반영되지 않는 건 아니었고, 나이에 맞는 직급이 보장되고 유지되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세계화가 몰아치는 지금의 상황은 개인과 기업에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보통의 평범한 능력으로는 승진은 고사하고, 자리보전하기도 어려워 졌다. 여기에 현대인의 심각한 고충이 있고, 기업이 당면한 고민의 문제가 놓여 있다.


어느 조직이건, 조직위계상의 상위계층은 하위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적다. 피라미드 유형의 조직이건, 네트워크 조직이건, 평면화된(flat) 조직이건 간에, 상위계층으로 이동은 경력상승의 한 방법이고,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기대하는 바다. 그러나 우리의 직장에 글로벌 무한경쟁이 뛰어들며 판이 전혀 달라졌다. 국내 리그전에 갑작스런 월드 스타급 인재들, 사업들이 각축을 벌이고 뛰어들면서, 판도는 과거의 잣대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고, 직업관에 대한 인식 자체도 노사가 공히 급변했다. 잡(job)은 날아가고, 경력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간 한국 직장인의 경력경로는 정규 학교를 졸업하고, 입사를 하면서 능력과 운이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상위층으로 이동하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그러다 일정한 시점, 즉 팀장이 되거나, 임원이 되는 직전후의 시기에 다시한번 경력빅뱅의 시기를 맞이했다. 도약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어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누구든 넘볼 수 있는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지녔던 경쟁력, 즉 입사시까지 투입한 정규교육과정 12년 동안의 영어 교육과 대학에서의 전공 분야는 글로벌 경쟁이 요구하는 밀도를 밑도는, 범세계적 기준으로 보자면 다분히 희석된 저밀도 수준에 불과했다. 12년도 모자라 직장생활을 하며 투여하는 어학은 투자 대비 효과가 늘 미미하다. 효과성이나 적용도도 기대 이하이다. 어학 능력을 측정해 보면 동남아 수준보다 훨씬 밑돌고 있고, 이는 글로벌 환경과 많은 면에서 동떨어져 있다. 더 큰 문제는 단일한 가치나 능력이 대학입시의 교과과정처럼 정형화되어 있고, 이것을 이 사회는 지속적으로 검증 안된 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이 같은 편중된 교육체계가 기업의 존립을 가져올 유효경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제는 경쟁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철저하게 득실, 효과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어학 분야뿐만 아니라. 전공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원천지식, 기술에 한참을 밑돌고 있다. 창의성은 ‘남을 따라 배우는’ 벤치마킹 시대가 끝난 지금 교과과정과 기업 생존의 절대절명의 핵심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인식과 투자는 여전히 신통찮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직위 상승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느려지거나 멈추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중간 관리층을 중심으로 정체를 맞이하고 있고, 성장은 캡(cap)에 씌워져 있는 듯하다. 고임금의 구조를 대신할 각종 툴과 기술은 얼마든지 있다. 단순 기능인력을 대체할 대안들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 개인들은 글로벌 경쟁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찾아 온 경력의 빗장에 걸려 일정한 높이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경력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력 정체 현상을 ‘경력고원(經歷高原, career plateau)’이라고 하는데, 이는 조직에서의 개인의 직위상승이 느려지거나 정체되는 지점을 뜻한다.


개인에게 경력고원이 발생할 경우, 개인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자신과 조직의 갈등, 불만족을 표출하며, 전반적인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실망과 낭패감을 감추지 못한다. 군중속의 고독감을 느끼며, 고립감, 정체성에 빠져들며, 삶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적잖은 도전 환경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런 초기 경력고원에 대한 인식은 경력고원이 없어져야 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경력고원을 나의 변화의 기회, 전환의 시간, 도전과 성찰의 시간 등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경력고원은 왜 발생하는가? 개인들의 적절한 지식과 기술 부족을 들 수 있다. 또한 단일한 가치, 단일 경력 경로가 가져온 한계로 볼 수 있다. 경쟁의 구도가 바뀐 상태에서 한 루트만 찾다보면 다른 고지로의 진출조차 꾀하지 못한다. 이제는 <그림>에서 처럼 다른 방향으로의, 차별화된 방법으로의 진출이 모색되어야 한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 필요성이 저하되는 것이 아닌, 가치창출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를 앞서지 못하면, 자신이 지금껏 쌓아올린 경력은 순식간 장애물로 둔갑하며 조만간 ‘경력증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예컨대, 아직도 시골에 가면 한 두 군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장장이를 가치켜 ‘경쟁력 있는 경력·직업·산업’으로 인식하지 않듯, 글로벌 경쟁력, 즉 기술이나, 영업, 마케팅, 신제품 아이디어, 시장 노하우, 혁신 가치, 창조성 발현 등에 있어 남다른 역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기업은 물론, 개인의 존재가치조차 사라지게 된다. 우물이 말라버리는 산업군, 사업기반, 개인역량에 발 묶여 있는지 철저한 자가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경력이 이렇게 정체를 맞게 될 때 기업들은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기업은 성장도 변신도 꾀하지 못한 채 개인이 맞는 경력고원과 같이 사업이 정체되어 시장과 경쟁사에 끌려 다니는 ‘사업고원(事業高原 business plateau)’의 고립무원의 한계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만 준비 안된 인력들은 짐으로만 다가온다. 이제 구조조정의 서막이 오르는 것이다.  


이제 개인이나 기업은 경력고원에서의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 가치를 잉태하는 지식과 기술의 부족분을 찾아내고 이를 보정, 보강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개인의 기술과 능력, 개인의 요구와 가치, 내·외적 동기, 조직성장의 방안을 찾는 기업과 개인만이 경력고원의 덫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주도적으로 열어 갈 수 있다. 기업은 직원들과 공동의 생존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생존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개인은 변화한 환경을 능동적으로 자기개발을 위한 장으로 인식하고 총체적 자기점검, 자기 발전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만일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원의 칼바람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기업과 개인이라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결과는 ‘사라지는 것’이다.


한국 기업사는 사라진 기업을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사라진 사람들과 직업군에 대해서는 기억력 ‘0’로 작용할 뿐이다. 때 늦지 않는 시기에 고원에서 벗어나 드넓은 평원으로 내딛는 혁신에의 지혜가 필요하다.
ⓒ전경일, <드림파트너>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