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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기회를 포착하는 매 같이 날카로운 눈

by 전경일 2013. 4. 10.

기회를 포착하는 매 같이 날카로운 눈

 

이 시기 구인회는 정보에도 눈을 뜨기 시작해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이 된다. 여기엔 중외일보를 경영하던 손 위 처남인 허선구의 영향이 컸다. 구인회는 대중 매체에 대한 식견을 넓혀 나갔다.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때였으므로 라디오를 열심히 들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정세 파악에 민감했기 때문에 귀 기울이던 라디오가 훗날 플라스틱 사출업을 기반으로 설립한 금성사의 주력 상품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기는 기업가 구인회의 초기 경험에 해당된다. 그는 협동조합에서 쌓은 경험으로 3년 뒤인 1931년 포목상을 열게 된다.

이때 구인회가 포목상을 주 아이템으로 선정한 이유는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업종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잡화상인 무라카미 가게를 이겼듯이 일본인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일인(日人)이 식민지 조국의 모든 상권을 움켜쥐고 있던 시기였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도전이었다.

 

앞서 잡화를 취급했던 것과 달리 구인회가 포목상에 뛰어든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본인이 생각했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간에 이 사업적 판단은 궁극적으로 그를 산업의 싹을 지닌 사업에 뛰어들게 만든 계기가 된다. 확장성과 유관산업과의 연관성은 사업이 커나가는 배경이 된다. 그 큰 산업 단위를 구인회는 광목 한 필을 둘러메고 들어갔다. 이미 1919년 서울에서는 포목상들이 밀집해있는 종로의 중심에 동양물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종로상권을 초토화시켰고 포목상들은 상권을 지키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924년 종로의 포목상들은 일본, 중국과 직거래를 하기도 했고, 백윤수의 경우에는 포목상을 경영하며 축적한 자본으로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선례들이 구인회로 하여금 일본 상인과 맞붙어 보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구나 진주는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처음 싹을 틔운 진양과 맞붙어 있는 한국 면업의 고향이기도 했다. 포목은 오랫동안 조선의 화폐 기능을 수행한 주요 물품이자 환금성이 높은 상품이기도 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산업의 맹아로 성장하고 있던 분야였다. 경제 여건이 이렇다보니 포목은 사업성도 컸고, 시장도 넓었다. 구인회가 그의 사업적 신념 중 하나인 '큰 시장'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이 같은 경험을 통해서이다. 이때 구인회가 취급한 물건은 훗날 그룹이 되는데 초석이 된다. 그 최초의 아이템이 포목이었던 것이다.

 

 

사업의 출발, 피나는 결단

 

날마다 구인회는 골똘히 생각했다. 무엇부터 점검하고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신속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우선 지수협동조합과 거래하던 진주의 천종상점(千種商店)을 찾아가 포목상 경영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고 부친을 설득해 장사를 시작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집안 내부에서는 반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감히 장손이 장사한다니!"

 

유교 집안의 맏이가 장사를 하는 것에 대해 조부와 부친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구인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장남의 강인한 신념에 윗어른들은 설득되고 만다.

 

"옜다, 2천원이다. 내 형편으로 더는 못주니 가서 네 생각대로 잘 해 보거라. 세상을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

 

부친이 백지에 소중하게 쌓아두었던 돈을 내놓는 것을 보며 구인회는 마침내 일생의 첫 창업 전선에 뛰어 들게 된다.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얘기였다. 장사의 기본인 인화와 신용을 반드시 얻으라는 부탁이자 책임 경영을 촉구한 단호한 분부이기도 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사업자금 2,000원을 받고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던 동생 구철회를 설득하여 1,800원을 합해 3,800원을 손에 쥐게 된다. 이 돈으로 경남 진주시 진주식산은행(晋州殖産銀行) 건너편 2층 건물에 ‘구인회 상점(具仁會 商店)’의 간판을 내건다. 업종은 포목점. 이때가 1931년 7월이었다. 7년 뒤인 1938년 이병철 삼성 회장이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 상회’를 시작한 것에 비하면 출발은 훨씬 빨랐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던 셈이었다, 구인회의 가슴엔 기업가 정신이 불타고 있었다. 구인회가 '구인회 상점'을 진주에서 시작한 것은 진주가 유행과 소비를 주도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외국 포목은 기생이나 돈 많은 귀부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사업의 시작을 보다 큰 고객이 있는 곳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과거 승산 마을의 협동조합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사업 거점을 정함에 있어 일대 도약이었다. 게다가 진주에서 개업한 구인회에게는 별도로 사업의 문리가 트이는 적잖은 덤이 주어졌다.

 

진주에는 진주에 살면서 러시아 석유특약점 가게를 차리고 있던 일본인이 있었는데, 이런 사업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구인회에게 어설프나마 무역에 눈을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경험은 벤치마킹과 창조적 운용을 통해 점차 확장돼 나갔다. 이 점이 훗날 그가 무역업에 손대는 경험 치로 작용하게 된다.

 

구인회가 진주를 터로 잡은 것은 본격적인 상업 자본뿐만 아니라 토지와 상업 양쪽에 발을 걸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우연이든 자로 잰 듯한 계산에 의한 것이든 그는 훗날 이 장점을 사업 확장에 기가 막히게 써먹는다.

 

사업은 처음엔 잘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구인회의 첫 사업은 ‘실패’였다. 포목의 수요, 유통 및 마케팅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했지만 상대적으로 점포 규모가 작고 품목이나 재고량이 많지 않아 기존 업체와 경쟁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물건이 많아야 고객이 몰릴 것 아닌가. 사업 첫 해에 구인회는 무려 500원의 손실을 보았다. 입 안이 소태처럼 썼다.

 

쓰디쓴 실패를 통해 구인회는 세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사업에는 넉넉한 자본, 좋은 길목, 타고난 시운(時運)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세 가지를 특별히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몰랐지만 행운의 여신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손짓 하고 있었다.

 

첫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구인회는 이듬해 부친을 찾아갔다. 이번 귀향은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고 발길이 천근만근이었다. 마침내 부친을 설득한 구인회는 고향마을의 300석지기 논문서를 담보로 동양척식회사에서 8천 원을 대출받아 역발상으로 가게 규모를 더 확대한다. 이때 부친은 논문서를 내놓으며 이렇게 당부한다.

 

"너 어렵게 되면 우리 집안도 설 자리를 잃게 되느니라."

 

그러며 부친은 큰 아들의 얼굴을 근심스럽게 내려 보았다.

 

"초반에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결판나지 않겠느냐. 조급하게 생각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한 발 두 발 발전해 가도록 해라."

 

구인회는 아버지의 당부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개만 돌려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입이 한 둘이 아니었다. 부모, 형제, 애들······ 그는 비장한 각오를 마음속에 다졌다.

 

'자칫하다간 집안이 몽땅 망한다!' 어금니가 깨어지도록 다물어진 입은 좀처럼 벌어질 줄 몰랐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