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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커가는 경험, 확장되는 사업의 눈

by 전경일 2013. 4. 11.

커가는 경험, 확장되는 사업의 눈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는 매점매석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 나온다. 매점매석에 대해 허생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뭍에서 나는 산물 가운데서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린다든지, 물에서 나온 고기를 하나 슬그머니 독점해 버린다든지, 약재 가운데서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리면, 그 한 가지 물건은 한 곳에 갇히게 됨으로 모든 장사치들의 수중이 다 마르는 법이니 이것은 백성을 못살게 하는 방법이야. 뒷세상에 나라 일을 맡은 이들이 행여 내 방법을 쓰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걸세."

 

허생 스스로 썼던 독점의 폐해를 지적한 말이다. 허생전에서 애기하는 독점과 구인회식 독점은 많은 점에서 닮은꼴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불법으로 간주되지만 이 무렵 구인회가 취한 장사 방식 중 하나는 매점을 통한 이익 극대화였다. 즉 비성수기에 포목을 사서 성수기에 내다파는 매점 매석식 사업 방식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올린 것이다. 이 무렵 터득한 시간차에 따른 시장창출 방식은 그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때마다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사업을 하는데 자신의 주요 원칙을 이렇게 내세웠다.

 

'절대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 자[尺]를 속이지 않고 물건을 판다.'

 

요즘 같아선 단순한 원칙 같아 보이지만 여기에는 장사꾼 구인회의 깊은 장사법이 숨겨져 있다. 시장에서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고객 만족을 꾀한다는 경영철학이다. 구인회식 고객 응대법은 철저히 신뢰를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적정 마진은 확보하고 단골고객의 충성도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었다. 이런 '제값 받기'는 이후 럭키(LG)의 주요 사업 원칙이 된다.

 

그는 요즘 말로 '선물(先物)'에 착안하게 된다.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포목의 유효 수요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고 강우량과 모내기의 상관관계를 유심히 관찰해서 포목 경기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장사에 대한 본능적 감각과 예민한 분석력이 뒤따라야 했다. 요즘말로 경기상황을 이해하고 복잡계의 경영 환경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될 것 같을 때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구인회는 장사의 입지 조건을 갖추어 나간다. 노력 덕분에 모든 게 잘 돌아가는 듯했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새로운 각오로 사업을 재개한, 구인회상점은 그 해 장마로 포목이 한순간 물에 잠기고 만다.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구인회로서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던지 8천원 어치의 피륙을 사들일 때 상점 안이 너무 좁아 부피 있는 물건은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그것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업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있고 불행 중에도 행운은 찾아온다고 한다. 그 해 가을 수해의 영향으로 피륙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구인회는 피륙을 팔아서 간신히 홍수 피해액을 보전한다. 실로 하늘이 도왔다. 이후 사업은 특별한 시련 없이 제 자리를 잡아 가는 듯했다. 그런데 1936년에 또다시 대홍수가 나며 진주 시내가 물어 잠겨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밤 만에 불어난 남강(南江)의 물이 야음을 틈타 진주시대로 밀어 닥친 것이다. 이런 천재(天災)에 그만 가게가 떠내려가 버리고 만다.

회생 불능인 듯 시련은 가혹했다. 어떻게 일군 가게던가! 이렇게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다니······.

 

홍수로 모든 것을 잃은 듯 했지만, 구인회는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이었다. 그동안 장사를 통해 쌓아올린 고객과의 신뢰, 거래처와의 신용, 자신의 상업적 경험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앞의 두 가지는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당부 받은 바였고 뒤의 것은 자신이 사업을 통해 얻은 자산이었다. 아무리 무너지고 깨져도 이것들을 밑천으로 다시 용기를 낸다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구인회는 동생과 점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불현듯 옛말이 떠올랐다.

 

"장마 진 해에는 풍년이 든다."

 

그 순간 구인회는 무릎을 쳤다. 그는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주변 사람에게 다시 거금 1만원을 빌려 넌더리가 날만한 포목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예측대로 그해 풍년이 들자 그동안 미뤄 둔 혼수 수요가 폭증한다. 덩달아 포목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했고 구인회의 사업인생도 다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두 번 좌절 끝에 세 번째의 도약이었다.

 

그 무렵 구인회는 개인적으로도 1936년도에 장녀 구자숙을 결혼시켜 29세 나이에 사위를 보았다. 그 후 부산과 마산에서 포목을 대량으로 구매해 많은 이익을 보았으며, 1937년부터는 경성방직에서 생산되는 태극성표 광목을 대량으로 취급하고 손아래 처남인 허윤구가 경영하는 조선물산에도 투자해 서울과 만주를 내왕한다. 조국은 식민지 통치에 신음했지만 기업가 구인회에게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구인회는 보다 혁신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포목을 매점(買占)으로 파는 것뿐만 아니라 비단이나 인조견직물에 수를 놓거나 날염을 해서 고객 취향에 맞추는 것이었다. 훗날 LG의 '고객만족 정신'은 이때 구인회식 혁신경영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고객들은 구인회 상회가 제공하는 별색(別色) 맞춤형 문양에 빠져들었다. 기존에 대량으로 생산된 문양과 함께 맞춤식으로 가공된 별도의 문양을 제공함으로써 상품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이는 구인회가 생산ㆍ개발에 얼마나 창의적인 사고를 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구인회 상점에나 가야 구할 수 있는 온갖 옷감들은 상점 좌판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고객은 발을 멈추었다. 이제 진주 시내에서 '구인회 상점'과의 경쟁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아이디어로 신제품 개발에 나서는 구인회의 사업가적 자세는 이때 본격 가동된다. 시장의 요구에 맞춘 혁신적인 노력은 이후 지속적으로 더 큰 혁신을 이뤄내며 유관분야로 계속 확장돼 가는 효과를 가져 온다. 구인회의 사업가적 면모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 있다. 포목상에서 무역업으로의 진출이 그것이다. 구인회의 장사 묶기 장점은 이때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다.

 

첫째, 구인회는 대인관계가 좋아 남에게 신용을 얻고 있다. 둘째, 매사에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기 때문에 실수가 적다. 셋째, 기회를 포착하는 데 남이 흉내를 내기 어려울 만큼 신속하고 과단성이 있다. 작게는 장사 묶기지만 크게는 기업 경영자로서 현장 경영 수업의 일환이라는 것은 머지않아 드러난다. 포목상에서 무역업으로의 진출은 경영자로서 그의 결단력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갈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전의 성공 경험을 확대재생산해 낸 것이다.ⓒ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