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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생산과 유통을 수직 통합하라

by 전경일 2013. 5. 14.

생산과 유통을 수직 통합하라

 

때마침 운전자금에 쪼들리는 판이었던 흥아 화학은 조선흥업사를 고객으로 잡고 나니 반갑기만 했다. 조선흥업사 덕분에 기존 유통망이었던 대구, 인천을 벗어나 서울까지 입성해 들어갈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전국적 판매망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제조와 유통, 흥아 화학과 조선흥업사의 관계는 이렇게 만들어 진다.

 

구인회는 타고 난 사업가였다. 기회를 다른 더 큰 기회에 결부시키는데 발군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 시기 구인회는 하나의 가치에만 매달린 게 아니다. 구인회는 화장품 유통 사업이 잘 풀려 나가자, 이번에는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유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흥아 화학에 자주 들르게 되었고, 여기에 제조까지 거머쥔다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듯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유통만 하다가 곧 생산-유통 모두를 장악했다. 그의 마음 속엔 요즘 경영용어로 수직적 통합과 가치 사슬을 이루어 시장을 통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꿈틀 거렸다. 그는 집에서 직접 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구인회에게 천운이 따랐는지 이때 제조업으로 확장 계기는 우연찮게도 흥아 화학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제공됐다. 공급사 내부에 내분이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흥아 화학의 크림통 뚜껑은 검은 색이 대부분이었다. 원료를 좋은 것을 쓰면 빨간색도 나와 인기를 끌었는데, 빨간색 뚜껑은 한 4백 타스 쯤 나왔다. 이것을 김준환이 몽땅 조선흥업사에 넘겨주었는데 그게 문제의 발단이 된다.

 

이 사실을 안 흥아 화학 박성수 사장은 김준환을 불러 왜 조선흥업사만 잘 해주냐며 혹시 뒷돈을 먹은 게 아니냐고 닦달해 댔다. 처남 매부 사이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의 관계는 영원히 깨지고 만다. 그때 만일 흥아 화학 무너지지 않았다면, 업계의 판도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구씨ㆍ허씨 연합 대비 박씨ㆍ김씨 연합은 이렇게 상호 신뢰 면에서 무너지며 구인회에게 엄청난 기회를 몰아준다.

 

『LG사사(社史)』에 나오듯 박성수-김준환 팀의 내분이 이런 불화를 계기로 촉발된 것인지, 아니면 구인회의 전략적 포석에 의해 김준환이 이탈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처남과 헤어진 김준환이 독자적인 사업을 구상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화장품 업계의 최고 기술자로 불린 김준환은 처음에는 크림 만드는 기술을 최대한 발휘해 독자 사업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출도(出島)비누공장 주인으로부터 원료를 사들일 돈이 없자 그는 구인회에게 손을 내민다. 구인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성(固城) 땅 300석 지기를 즉시 36만원에 털듯 팔아 버리고, 손때를 묻히며 키워온 구인 상회도 50만원에 신속히 정리해 버린다. 여기다 이런 저런 재산을 두들겨 팔아서 3백만 원을 마련한다. 그 돈으로 피마자기름 40통과 글리세린, 향료 등 원료를 확보하고 김준환을 공장장으로 임명해서 직접 생산에 들어간다. 럭키로서는 최초로 생산과 유통이라는 수직통합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 시기 구인회의 결단과 판단력, 실시간으로 실행에 옮기는 순발력은 경영자로서 그의 능력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들였던 땅을 신속히 팔아 해방과 함께 부산으로 사업을 옮겼듯이 이때 제조업으로의 진출 결정은 장사꾼에서 기업가로, 일개 상점 주인에서 훗날 그룹의 주인으로 탈바꿈 하는데 전환점이 된다. 젊은 시절을 함께 해온 피땀 어린 구인 상회를 팔 정도였으니 그가 화장품 제조업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지 알 만하다. 바야흐로 락희화학공업사의 탄생 여건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이 세기의 창업자는 상표를 구정회의 제안대로 미군들 사이에 유행하는 '럭키스트라이크' 담배에서 따와 '럭키'로 한다. 상호도 역시 같은 발음으로 하여 1947년 1월 드디어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 현 LG화학)를 설립한다. 럭키표 크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표 '럭키(LUCKY)'는 부산 화장품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외제 화장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야심찬 국산 브랜드였다. 미리 미군정하의 판도를 읽어내고 미 군정청과 무역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은 '럭키' 브랜드가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럭키'가 처음부터 대중적 마케팅의 일환으로 상호명이나 제품명으로 정해졌음을 알게 한다. 구인회다운 상재(商材)가 발동한 것이다.

 

'럭키 크림'은 전국적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생산이 수요를 못 쫓아갈 정도였다. 그런데 수요가 많아지면 품질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긴 구인회는 사업 원칙으로 뛰어난 기술력과 품질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 같은 품질 일등주의 정신은 훗날 LG의 주요 사업 철학이 된다.

 

물자가 귀한 시대에 매점한 원료를 사용한 럭키 크림은 경쟁사 제품이 1타스에 5백 원 할 때 그 두 배인 1천 원이나 했다. 그럼에도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여기에는 품질에 대한 구인회의 확고한 철학이 밑바탕이 된다.

 

 

 

<1947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화장품인 '럭키 크림'>

 

화장품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사세는 급신장하여 사장 구인회, 공장장 김준환, 섭외담당 구정회, 판매 및 수금담당 허준구 체제가 만들어 지고, 락희는 번영일로에 올라서게 된다. 김준환은 나중에 락희호(號)에서 이탈한다. 남은 삼인방은 초기 락희의 성장 동력이었다. 특히 처음부터 나타나는 구씨ㆍ허씨 간 주요 역할분담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자기 포지션을 지키는 주요 동업의 원칙으로 자리매김 된다.

 

구인회식 사고는 역발상과 시장에 대한 통찰의 결과였다. 해방 직후 먹을거리마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수요는 변함없이 표출되었고, 이는 락희화학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주변에 있던 구씨ㆍ허씨 집안사람들도 불붙듯이 일어나는 사업에 속속 합류해 들어왔다. 1947년 4월, 맏아들 구자경이 부산사법부속국민학교로 전근되어 와 근무하다가 49년에 사직하고 락희에 합류하였고, 동생들과 자녀들도 사업을 도왔다. 이런 팀워크로 럭키 크림은 생산 5년 만에 거금 3억 원의 이윤을 올린다.

 

여기서 우리는 LG라는 기업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며 하나의 일관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구인회가 벌인 사업은 대부분 생활 밀착형이라는 것이다. 또 산업의 원줄기와 맞닿아 있다. 한 산업을 얻으면 그 아래 여러 개의 사업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타 산업으로 뻗어 나갈 조건이 만들어 진다.

 

산업 초창기의 일이었지만, 구인회는 화장품을 통해 산업 전체의 맥을 쥐는 사업을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덕분에 욱일승천의 기세로 커져가는 락희의 사업 확장성은 거의 무한대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는 기업에 또 다른 엄청난 시련과 대격변기를 몰아오고 있었다.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