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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어디 원숭이나 쥐보다 더 나은 학습법 없소?

by 전경일 2016. 1. 8.

어디 원숭이나 쥐보다 더 나은 학습법 없소?

 

시간의 경과만으론 결코 밝아오지 않는 그런 아침이 있다. 우리의 눈을 감게 하는 빛은 암흑에 불과하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는 그날만이 밝아 오는 것이다. 새날이 밝아오기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태양은 하나의 샛별일 뿐이다.

- B.F.스키너

 

심리학 분야의 거목 B.F.스키너 교수는 1948년에 쓴월덴 투(Walden Two)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 나아가 세계를 변혁시키는 주역으로서 인간을 꿰뚫어 본 말이다.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온 주역인 인간을 다룬다. 이런 인간 존재를 알기 위해선 동물과 대별되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그것이 불러오는 학습 능력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인간의 학습 능력은 어떤 인지를 통해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지 예측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학습하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학습과 관련된 지적이고 상징적인 문제들에 주목해 왔다. 물론 학습과 관련된 습관들, 기능 및 기호 등 제 문제도 아울러 검토하고 있다. 학습에 관해 어떤 정의는 경험의 결과로서 행동의 변용이라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의 변용된 행동이라고 비슷한 풀이를 내놓기도 한다. 또 다른 심리학자들은 학습의 본질은 인지적이며 인식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이처럼 학습 과정에 대한 정의는 적지 않다. 학습 과정과 관련되어 유명한 몇몇 실험들이 있다.

 

현대 학습심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나 이견 없이 이반 파블로프를 최우선으로 꼽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실험은 고기가 개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에 벨을 울림으로써 벨과 고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성립시킨데 있다. 학습이 이루어지자 개는 벨 소리만 들어도 타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몇 실험에서는 벨이 울려도 고기가 나오지 않는 일이 되풀이되자, 개는 결국 다시 벨이 울려도 타액을 분비하지 않았다. 파블로프는 벨에 대한 개의 반응을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조건 반사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나아가 이 같은 조건 설정학습의 원리로 생각했다. 그는 이 연구로 조건 반사를 강화하기도 하고 약화시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수많은 절차를 개발해 냈다. 이런 짓궂은 실험은 개로서는 죽을 맛이었을 테지만, 우리는 학습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조금은 알게 됐다.(내가 집에서 이 같은 실험을 했더니 우리 집 개는 나중에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결코 누구나 흉내 낼 실험은 아닌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 돈 다이크는 파블로프와 마찬가지로 자극과 반응의 객관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학습을 문제 해결 수단으로 간주해 1898년 저 유명한 실험에서 굶주린 고양이를 상자 속에 집어넣고 관찰했다. 상자 속 고양이는 어느 정도 되풀이하자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학습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다음 불과 수초 만에 상자를 벗어났다. 다이크는 이 실험을 통해 고양이가 시행착오를 통해 특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학습한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시행착오는 학습자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심적 연합또는 결합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그가 학습은 결합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자기 확신에 찬 실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서 고양이는 상자를 벗어난 운동이 스스로 어떤 운동이었는지 자각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동물들은 학습을 통해 자기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적응시키기는 하지만, 학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변함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런 예는 침팬지나 원숭이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침팬지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목적을 위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유인원 연구학자 크레이그 스텐포드에 의하면, 침팬지에게 원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 친구에게 유인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더 모욕적인 처사라고 한다. 진화론적으로 침팬지는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 즉 사람과(hominid, 人科)에 속한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영리한 원숭이가 인간 대신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든가 재목을 쌓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육주를 위해 야자열매를 따 모으고, 호주에서는 양치기 역할을 하거나 트랙터까지 조종한다. 그러나 원숭이의 깨우침은 인간의 아기 이상으로 인지가 발달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훈련을 거듭해도 인간처럼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가질 수도 없다. 인간과 원숭이의 학습 차이는 지능의 기초인 전뇌(前腦) 차이이고, 이 차이는 극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1920년대 들어서면 행동주의 학습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존 B. 왓슨이 등장한다. 그는 마음은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심리학자가 무시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마음은 행동을 연구할 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로 보고, 학습이란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적절한 자극과 반응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풀이했다.

이 같은 기계적 인간관은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가 이렇게 확신에 차서 지껄였을 때 대중의 비난은 그에게로 퍼부어졌다.

 

나에게 1 다스의 건강한 아이들과 그들을 키울 목적에 충분히 알맞게 만들어진 나만의 세계가 주어진다면, 어떤 아이도 희망대로의 전문가로 만들어 보이겠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실업가, 그렇지 않으면 거지, 도둑놈이라도 좋다.”

 

심지어 그의 아들조차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고계에 뛰어들어 한껏 목청을 올렸고 사회적으로는 성공했다. 비록 왓슨의 주장은 큰 물의를 일으켰지만, 심리적 탐구 대상을 의식에 두어야 한다는 이전의 심리학을 뛰어넘어 심리학의 과학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수행했다.

 

왓슨 전후의 행동주의자들은 학습 과정을 기본적 요소로 분해함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한층 명확히 식별하고자 했다. 1920년대 들어서자 게슈탈트학파는 전체로 보고자하는 시도를 취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은 W.쾰러였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해안 앞바다의 테네리페 섬에서 유인원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학습이론을 개발해 냈다. 원숭이가 사고 과정을 통해 활동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원숭이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그런 실질적인 예였다. 그는 이것을 원숭이의 통찰력 있는 행동이라고 칭했다.

 

1959년에 들어서면 쥐 심리학자톨먼이 등장한다. 그는 이전의 이론을 전부 녹여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유명한국부지도포괄지도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국부지도를 지닌 동물은 좁고 똑바른 길 줄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포괄지도를 지닌 동물은 더 보편적인 눈을 통해 사물을 보며 때로 방식을 바꾸며 문제를 해결한다. 어느 지도나 특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조금이라도 문제가 변하면 국부지도는 순식간에 쓸모없어지고 그 역할은 포괄지도가 맡아서 하게 된다. 예컨대 쥐 실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쥐는 미로 학습을 할 때 먹이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문제를 거듭 해도 학습 성적이 오르지 않지만, 목표지점에서 먹이를 주면 발군의 성적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쥐는 심지어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에도 잠재 학습을 하고 있다가 먹이가 주어지면 그 즉시성과를 드러냈다. 톨먼에 의하면, 쥐들은 지도를 완성하고 있다가 동기가 부여되자 바로 그 순간에 그 지도를 사용한 것이다. 이 이론은 만약 국부지도가 아니라 포괄지도를 사용하면, 훨씬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거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와 달리 하버드대학의 B.F.스키너 교수는 보수를 통해 목표로 삼은 반응을 강화한다는 이른바 강화이론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행동을 많은 작은 구성요소로 분해해 각각을 계통적으로 강화한다는 생각에 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전적으로 강화에 의해서 형성된다. , 어떤 특정한 행동에 강화, 즉 보상이 주어질 때, 그 행동이 반복될 빈도는 높아진다는 원리다. 이는 당시대의 심리학 분야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들어서 다양한 분야에 쓰였다. 예컨대 기업의 카운슬링이나 장려제도 같은 인사제도에도 교묘하게 활용되었다. 현재에도 기업에선 가장 매력적이며 유효한 직원 유인책으로 쓰이고 있다. 성과에 따른 보상이라! 다들 그것 때문에 저 죽는지 모르고 종착역까지 죽어라 달리는 것 아닌가!

 

스키너와 전혀 다른 접근을 한 제롬 브루너는 지각 현상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누고 있다. 즉 준비된 상태, 환경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힘, 검증 이 세 가지가 그것이다. 그는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은 이전에는 인지되지 않았던 아이디어 사이의 관계와 유사성에 관한 규칙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감이며, 또 거기에 수반되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이 대충 정리한 현대 학습심리학의 골간이다.

 

오랫동안 진척을 거듭해 온 심리학 연구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게 있다. 그간 심리학자들은 개, 원숭이, 쥐 등을 대상으로 학습을 시켜보며 새로운 개념인 조건반사시행착오를 찾아냈으며, ‘과학적으로는 연구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탐구하고, 놀라운 착상인 국부지도포괄지도마저 만들어 냈다. 관계와 유사성에 관한 규칙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학자들의 연구는 인간 사회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첫째, (개 앞에 놓인) 벨은 계속해서 울려대고, 먹이는 변함없이 오늘도 나오고 있는가? 아니면 개는 교활한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고, 이제는 그 속임수를 간파하기 시작했는가?

 

둘째, 상자를 벗어난 고양이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가? 다른 실패한 고양이들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성공한 고양이는 자신이 성공한 방식을 다른 고양이들에게 가르쳐 주었을까? 아니면 혼자만 알고 그 같은 진실을 알리는데 무관심하거나, 뚝 시치미 떼고 말았을까?

 

셋째, 우리는 희망대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모두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의사거나, 변호사거나, 재벌가 자녀로 태어나거나, 자수성가형으로 출세를 하거나 등등. 설사 그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렇게 될 여지는 이 사회에서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이런 허풍장이의 말은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까?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지껄여대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개인으로 분리되어 혼자만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살면 다 이루어지게 되는 걸까? 우리는 이전에 자기 믿음과 존재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넷째, 우리는 직장이든 어디에서든 인간에게 사육되며 바나나를 따오는 원숭이보다 훨씬 통찰력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사육시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를 사육하는 자들을 사육하고픈 욕망은 없는가?

 

다섯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국부지도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손엔 아직 펴보지 않은 포괄지도를 들고 있는가? 보편적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게 일부러 좁은 길만 제시하는 자들이 주변에 없는가? 수많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프로파겐다에 이끌린 것처럼 내가 판단한 것은 실은 저들이 내린 판단을 내 머릿속에 심어 놓은 것은 아닐까? 혹시 나는 이 같은 질문을 남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해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여섯째, 어떤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화해 대는 고용주, 정부, 미디어와 우리는 어떤 민낯으로 매일 만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브루너의 말처럼 검증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절차를 밟고 있기나 한가. 아니면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외면해 버리는가? 이런 것들이 심리학으로서 사회 문제 읽기의 예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심리학자들은 왜 이 같은 학습 연구에 인간을 동원하지 않고 동물을 쓴 것일까? 1차적으로 내릴 수 있는 답이라면, 심리학자들은 문제 해결에 무엇을 사용했는지 단순하고 기본적인 기능을 알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매우 복잡한 지적 장치를 갖추고 있어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해석하는 게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동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실제로도 인간은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며, 솔직한 반응조차 극도로 자제한다. 다른 동물보다 주의력이 깊은 까닭에 오랜 시간 생존해 온 경험치가 반영된 것일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성은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없이 선거를 치러 왔지만 특정 후보를 왜 찍었는지도 모르고, 그 이유를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이다.(이런 사람들일수록 극히 사소한 것에는 막대한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붓는다.) 또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다 똑같다거나, ‘그래봐야 달라질 거 없다거나, ‘나한테는 아무 득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냉소적 태도가 옮은 것인 양 자가 확신한다. 이런 자들은 사실과 자신의 믿음 사이에는 부합되지 않는 가교만이 놓여 있을 뿐인데도 이를 맹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반응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은 스스로에게는 극히 바보처럼 행동하지만, 다른 누구 앞에서는 지나치게 똑똑하게 굴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똑똑한 원숭이들이 넘쳐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앞으로도 더 학습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학습하는 과정도 함께 학습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 똑똑한 원숭이들은 헷갈리는 짓을 더는 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2차적인 답으로 넘어가자면, (이건 좀 더 흥미로운 답이긴 한데,) 심리학자들이 학습 연구에 인간을 동원하지 않고 동물을 쓴 이유는 어떤 면에선 인간이야말로 동물과 별판 차이 없기 때문이다. 만국의 자본가들과 거짓 선동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 말을 모르진 않을 테니 부연할 필요는 없겠고 결론만 얘기하자면, 이런 속임수는 사회 곳곳에서 - 여전히 먹힌다. 고용안정화니 비정규직 폐지니 하는 거짓 선동이 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들의 거짓말은 왜 대중에게 계속 먹히는 것일까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오늘만을 살기 때문이다. ‘내일을 기약하는 건 따라서 유토피아적일뿐이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자본가나 권력자들일수록 더욱 더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