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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재혁신의 주창자들

by 전경일 2016. 11. 17.

 

재혁신의 주창자들

 

18세기 후반 이후 고구마 재배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먹거리 혁명의 성과를 평가하는데 중요할 것으로 본다. 조선후기 구황작물인 고구마는 조선 전래 직후부터 조정과 민간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19세기말까지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있었다. 재배가 불가능 한 것도 아니고 보급이 안 된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부에서는 사정이 이러하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고구마 보급에 나선다.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는 고구마 재배를 확대하여 구황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수차례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진한 보급 확대의 원인과 이를 타개하고자 한 내부혁신, 재혁신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당시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서영보의 경우

1794년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파견되었던 서영보(徐榮輔)는 연안의 여러 읍에서 고구마 경작을 확대해야 한다는 구황 대책을 내놓는다. 그는 1790(정조 14) 성절 겸 사은사(聖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호남위유사, 황해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민생 현안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졌고, 1798년에 창원부사가 된 후에는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으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특히 녹봉을 덜어 공익에 쓰고 나라의 곳간을 열지 않은 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서영보는 구황대책을 언급한 별도의 보고서[別單]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

 

고구마 종자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갑신년이나 을유년 즈음이었으니 지금까지 30년이나 되는 동안 연해지역의 백성들은 서로 전()하여 심은 자가 자못 많았습니다. 그 먹기 좋고 기근 구제에 효과가 있는 것은 중국의 민절(閩浙, 푸젠성 저장성) 지방과 마찬가지였으나, 우리나라 풍속에 처음 보는 것이어서 단지 맛있는 군것질 거리로만 여기고 있을 뿐 식량을 대신해서 흉년을 구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신은 항상 한스럽게 여겨왔습니다.

 

서영보는 호남의 실정과 고구마를 재배하게 된 경위, 구황 목적보다는 군것질거리로 주로 이용되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구황 용도로 활용되고 있지 않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점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구조적인 모순이 작용하고 있다. 서영보는 이 점을 지적하며 경종을 울리고 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해 나가는데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이 왕왕 많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영읍(營邑)의 가렴주구가 뒤따르고, 한리(悍吏)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빼앗았습니다. 관에서 백 포기를 요구하고, ()는 한 이랑씩 차지해버립니다. 이리하여 고구마를 재배한 사람이 곤란을 당하게 되고 아직 재배하지 않은 자는 서로 짓지 말자고 경계하게 되었다. 결국 고구마를 재배하는 근실함이 점점 사라져서 지금은 지극히 희귀하게 된 것입니다.

 

서영보가 임금 정조에게 별단을 올린 때는 179412월이었다. 별단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763년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지 30년 만에 잘 확산되어 가던 고구마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이 심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서영보는 수령들로 하여금 종자 번식을 엄히 추진하도록 하고, 마을마다 주관할 사람을 한 사람씩 택하여 어느 집이든 다 심게 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고,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는 태장을 쳐서 죄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삼남 연해와 도서에 재배를 권장하고, 나아가 서북 이외의 육도에 모두 경작시키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전제조건으로 탐관오리들의 악폐를 엄히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담배나 수박처럼 나라 전체에 보급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국가에서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해져 나라 안에 두루 퍼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영보의 ‘10년이 지나지 않아라는 주장의 필요충분조건을 견주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문익점의 목화씨이다. 고려 말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는 3년에 걸친 집중 재배와 종자 채집의 결과 10년 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되기에 이른다. 배양과 재배에 성공해 보급확대가 임계치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25년 후인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목면은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고, 46진 개척 시 북점화(北點化) 정책에 힘입어 북쪽으로 재배 면적을 넓혀 나간다. 백성들의 의()생활은 물론, 벽지문화가 생겨나고, 식생활이 개선되고, 군수물자화 되며, 다양한 분야에서 신성장 엔진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특이한 점은 30년 전 고구마를 보고 조엄이 문익점처럼 퍼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듯, 서영보도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퍼뜨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익점은 시대를 뛰어넘어 초발혁신확산자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고, ‘문익점처럼은 가장 강한 혁신의 슬로건으로 조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왔던 것이다. 그 역할을 고구마의 경우에는 조엄이 대신하게 된다.

 

이처럼 확산에는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간이 있다. 또한 혁신을 가로막는 제도적 모순까지 아울러 혁신해야만 하는 난제가 주어진다. 온갖 제도적법적사회적 인식면의 두터운 저항선은 새로운 혁신 상품의 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단순히 기술이나 상품의 우위성만으로는 시장을 뚫고 나가기 어렵다. 많은 혁신 과제들이 제품 자체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과 제도개선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은 조선후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지속혁신을 위해 재혁신의 추진 동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혁신이 태생적으로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화의 경우

서영보 이외에도응지농서(應旨農書)를 통해 고구마가 구황에 적합한 작물이라는 주장을 편 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응지(應旨)란 재난에 처했을 때 임금의 구언(求言)에 응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응지농서란 임금의 유지(諭旨)에 응한 농서를 뜻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가적 재난 시 민간의 의견을 정책 제안으로 제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식이다. 1798(정조 22)응지농서를 올린 상주 유학 이제화는 고구마가 구황에 적합한 작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그 효과가 콩이나 조와 거의 같아 배를 채우고 위장을 기름지게 하며 맛 역시 좋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고구마가 중국과 일본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는 현실을 제시하며 고구마를 각 도에 널리 보급하여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구마가 중국과 일본에서 지천으로 재배되고 있는 점을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미 모두 쉽게 생산하여 이익을 얻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만 종자를 심지 않는 것은 애석하지 아니한가. 진실로 이 종자를 옮겨 심어 각 도에 널리 퍼뜨리면 식량 대용이 되고, 농사에 힘쓰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고구마를 각도에 널리 보급하여 곡물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제화는 이미 경성과 영남에서 고구마를 시험 삼아 재배한 결과, 쉽게 자랐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조그마한 땅에 넓게 심어도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제화의 응지농서를 검토한 비변사는 임금에게 아뢰면서 고구마가 구황에 요긴한 작물이기는 하나 남해안 연안 각 읍에 간혹 재배하고 있는데 연전에 이미 배양할 것을 단단히 일렀지만 실효가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마는 남해안 연안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련의 논의과정에서 고구마는 대대적으로 보급된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역설되고 있는 점은 부패한 관료 사회의 가렴주구가 극에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중앙관청의 서리는 물론이거니와 지방의 향리, 수령 등이 전세(田稅)를 거두는 과정에서, 환곡을 빌려주고 받는 과정에서,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오만 가지 희한한 방법으로 농민의 생산물을 갈취하기에 여념이 없을 만큼 부패가 만연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민생은 도외시되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