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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비전의 창조자, 미래의 전도사가 되라 한 나라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기 위해선, 변화에 앞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변화를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것을 자기 식대로 다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이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처음의 변화에 있던 사람들과 나중에 있던 사람들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 숫자로만 보면 - 맨 마지막에 단 한 사람만 남기도 한다. 세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생에 끝까지 자신의 국가 경영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로 인해 역사를 초월한 경영의 비전을 열어 젖혔다. 그것은 이 땅에 국가 경영을 하겠다고 등장했던 뭇 제왕들 중에서 그가 실로 유일무이하게 새로운 국가경영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결코 성과에 기반한 ‘업적’..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프로젝트를 직접 관리하라 세종은 국가 경영에 있어 CEO가 직접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형식을 취했다. 국가 CEO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무 행정 체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식, 즉 총재(冢宰) 중심의 ‘선왕지제(先王之制)’와 군주 중심의 ‘시왕지제(時王之制)’가 있었다. ‘선왕지제’란 재상을 정점으로 하여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고, 왕은 정치의 상징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시왕지제’ 란 왕이 행정의 실무를 직접 장악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왕권의 행사를 견제하려는 신하들로써는 당연히 ‘선왕지제’를 취하도록 하고자 했음은 물론이다. 세종은 실무분야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시왕지제’의 방식을 취한다. 세종은 이처럼 전임 CEO인 태종이 취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취임..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자신이 만든 원칙은 지켜라 “법을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을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세종실록』22년 8월 경진) 이 말은 오늘날 누가 한 말이 아니다. 600여 년 전에 세종이 한 말이다. 세종은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원칙 밖에 놓아 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원칙 속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한 국가의 CEO였지만, 자신에게 조차 어떠한 특권의식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종의 ‘법’에 근거한 원칙은 철저하게 ‘준법정신’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세종 8년 ‘금주령(禁酒令)’을 발동할 때에도 그는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술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세종실록』8년 5월 갑진)라며 스스로 준법을 결의했던 것이다. 자신은 술을 마시면..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회의와 비서실 운영에 강한 세종 세종은 회의와 비서실 운영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여론을 종합하는 기능과 더불어 정책 실시에 있어 충격을 완화하고 이견을 조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세종시대 국정 운영의 방식의 하나는 의정부ㆍ6조ㆍ대간 등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부터 국사가 상달되고, 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것이었다. 상달되는 상소ㆍ계의 내용은 바로 그 시대 국가 경영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안’이 밑에서부터 올라가게 함으로써, ‘밑’의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다는 차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세종이 취한 또 다른 방식은 CEO가 의정부ㆍ6조 및 중신들을 불러 국정을 직접 논의케 하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군주의 독단에 의한 국가 경영이 아니라, 이견을 수렴하는 회의라는 차원에서 매우 열려있는 경영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작은 실수보다 큰 공을 높이 평가하라 [조직 운영의 달인이 되어라] 어느 시대나, 어느 조직에서나 조직 운영의 달인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 같이 현실을 짚어 볼 줄 안다. 조선의 전임 CEO들도 예외가 아니다. 창업을 위해 많은 세력들과 연대하거나 제휴해 그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문제’를 알고 조직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국가경영권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은 당연히 생사를 거는 문제였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한 ‘힘’은 국가 경영권 창출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였다. 조선은 강한 힘을 얻어 역성혁명에 성공 했으나, 내부에 ‘공신(功臣)’이 넘쳐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엔 인력 과부하 현상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일을 할 인재들을 배치할 자리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공신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낙하산 인사’가 필요하기도 했다...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나는 가까이 있어도 너가 그립다 [팀 플레이를 하라] 세종은 일이 되도록 하는데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국가 CEO라고 해서 강압적인 측면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자신과 남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릇 역사상 ‘경계’를 뛰어 넘지 못하는 CEO들이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었다. 세종의 이같은 측면은 역사상 다른 CEO들과 비교해 분명 차별화의 요소다. 세종은 개인과 팀을 구분해 접근하되, 그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조직 운영 및 정책상의 배려를 각별히 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유일한 개인 개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가 ‘천민(賤民)’을 ‘천민(天民)’이라 한 것도, 각 두뇌집단에 소속된 멤버들에 대한 경력 관리를 개인의 특성에 맞게 실시한 것도 모두 알고 보면, 인간에 대한 ..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