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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 소장_ 더씨드_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도요타자동차가 되었는가_홍보 영상 동영상 ⓒ크래듀(주) 문익점 강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문익점의 목화씨와 혁신의 비밀 700년! 이제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의 강의로 만납니다. 2017. 3. 8.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신라는 건국 이후 꾸준히 군사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왜구대책에 있어서 대체로 방어전술로 일관했다. 왜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295, 407년)에 걸쳐 왜구의 근거지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신라는 왜구의 침입이 있을 때면 ‘선수후공(先守後功)’의 전술, 즉 왜구가 철수할 때를 기다려 기습, 매복, 섬멸하는 작전으로 왜구를 퇴치했다. 토벌에 성공한 9개의 사례 중 한두 번의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방어 전략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나라 고대 시기에는 유독 신라만이 왜구의 침범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학관계가 크.. 2017. 2. 23.
뿌리 깊은 왜구의 한반도 침략사 뿌리 깊은 왜구의 한반도 침략사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오랜 시간 역사적 교류가 함께 한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은 우호적 관계보다 갈등의 골이 더 깊다. 이 점은 지금도 변함없다. 왜 그럴까? 역사적으로 ‘오랜 이웃’이지만, ‘가까운 이웃’만은 아닌 한․일 관계의 씨줄 날줄을 파헤쳐 가다 보면 한국과 중국을 침구한 원인과 주체를 만나게 된다. 일본은 동아시아 바다가 ‘평화의 바다’가 아니라 ‘갈등의 바다’이자, ‘불안정한 해역’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한국과 일본 간 해양 거리는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불과 50킬로미터, 규슈까지는 200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근해조차 원양(遠洋)으로 벌려 놓는다. 과거형이든 현재형이든, ‘왜구’는 한․일 간 바다를 끊임없이 갈등의.. 2017. 2. 15.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일본 막부시기, 무용(武勇)을 과시하며 할거한 봉건 영주들은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차지하기 위해 해적단을 해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왜구는 고려를 비롯해 명나라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출몰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나아가 일본 봉건 영주들과 상인들은 해적떼를 지지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왜구는 이처럼 일본 지배계급과 연관된 해적떼이며 침략 집단이었다. 왜구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발생한 약탈집단이 아니라, 일본 봉건제도와 상업자본의 발전이 왜곡되며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자, 침략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1380년대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 왜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일본 내 민간 활동인 ‘잇키(一揆)’의⟨야토(夜討)·해.. 2017. 2. 10.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 왜구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 정부의 왜구 금압 요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왜구 문제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압을 요청하는 고려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 조정의 공식 입장은 “회답하지 않고 막부의 처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1368년 1월 중 승(僧) 본토(梵盪)와 본류(梵鏐)를 고려에 보빙사로 보내 막부의 회답공문을 바쳤다. 하지만 막부의 회답은 고려 정부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왜구가 규슈, 시코쿠(四國) 등지에 할거 하고 있는 무리들이어서 교토의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아시까가.. 2017. 2. 3.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2017.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