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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195

[창조의 CEO 세종] 이권(利權)은 오너에게 집중된다? 상업을 포함하여 경제 전반에 대한 운용과 관장은 최종적으로 국가와 CEO에게 속하는 권리였다. 조선 정부는 전체 상업을 독점 관리하였고, 이들 상업과 상인의 활동은 국가가 장악하여 통제했다. 이것을 ‘이권재상(利權在上)’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이권은 상(上), 즉 국가와 오너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제 하에 당대 상업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현실 세계에서 경제상의 이권을 둘러싸고 전개되던 신분 질서는 아래로 내려가 ‘상(上)’이 사(士)와 농(農)을, ‘하(下)’가 공(工)과 상(商)의 위치를 점하며 이를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맨 위에는 임금, 즉 국가 CEO가 있었다. 조선은 한마디로 한 가계(家系)가 소유하고(family owned) 경영권을 행사하되, 관료들과의 경쟁과 협..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세종 특명: 경제를 잡아라! 예나 지금이나 빵 없이 충효의 마음을 갖게 하기란 어렵다. 세종시대에도 먹고 사는 문제는 ‘치도(治道)’ - 즉, 국가 경영 - 의 핵심 사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를 기본 경영 이념으로 하는 신생 조선으로써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 과제였고, 그 다음이 교육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선부후교(先富後敎)’라 부른다. 즉, 백성들이 먹고 살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CEO도 제대로 경영했다고 볼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이 ‘배를 두드릴’수 있어야 하는 것은 국가 CEO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심지어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CEO는 권좌에서 쫓겨나는 신세에 내몰리기도 했다. 세종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경제’에 있..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세상엔 완벽한 CEO도 있다 세종은 국가 경영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도 완벽했다. 세종을 국가 CEO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그에게는 실적을 뛰어 넘는 분명히 다른 기준이 있었다. 세종처럼 정통성ㆍ효율성ㆍ도덕성을 다 갖춘 인물도 흔하지 않거니와, 거기에다가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천재적이며, 실천적인 최고경영자를 찾기란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실천의 화신이자, 국가 경영의 귀재였다. 세종에게 있어 권위는 그의 업적에 따라 당연히 찾아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한번도 CEO라는 지위를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자리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CEO를 자처하는 뭇 제왕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인성적 측면이 무엇보다도 강했다. 세종의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는 여러 태도 중에서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문무(文武)의 카리스마를 쌓아라 세종을 가장 이상적인 CEO로 보는 이유는 그가 현시대의 리더십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선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항시 변함 없었다. 예를 들어, 세종은 문종 때부터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략 200여 번이나 인용되면서 역대 CEO들 중 제일 많이 언급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그는 죽어서도 조선 제일의 벤치마크 CEO 였던 셈이다. 우리에게 가장 현실성 있는 리더십은 바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진다. 세종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CEO의 전범(典範)이었고, 국가 경영의 영원한 레퍼런스(reference)였다. 이러한 세종 자신의 리더십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 자신의 학문적 깊이와 균형 잡힌 인격에서 나온다. 그 시대는 자신만 준비되어 있다면, 충분히 세종과 같은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백성 사랑이 이 정도는 돼야 세종의 ‘애민(愛民)ㆍ민본(民本)’사상은 ‘공법(貢法)’ 제정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정책을 실시하기에 앞서 세종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 당시에 매우 선진적인 리서치 방법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셈이다. 이러한 여론조사는 사실 그의 ‘민주 경영’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전 CEO들이 취했던 강압적인 방법이 아닌, 백성과 진정으로 호흡을 맞추는 사랑의 실천 행위로 볼 수 있다. 이 점이 세종을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경영자’로 다시금 인식하게 만든는 것이다. 세종은, 공법 시행에 관한 보고를 받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농작물이 잘 되고 못된 것을 답사 고험(考驗)할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내 마음이 편치 않다! 세종은 신병 치료를 위해 온천엘 자주 갔다. 그런데 왕이 온천행을 하려면 가마와 마차가 지날 수 있어야 하니까 길을 닦아야 했고, 가마꾼도 대략 500여명이나 필요했다. 또 욕실과 거처도 새로 지어야 했다. 또한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 접대도 해야 하니까, 민폐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일을 빌미로 지방 수령들이 백성들로부터 접대비용과 욕실 및 행궁 건축비를 거두어 들이지 못하도록 세종은 엄중히 했다. 그런 연유로 세종은 건물도 새로 짓지 않고 이전 시설을 수리해 쓰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세종 24년(1442) 3월 강원도 평강 온천에 갔을 때, 세종이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이르는 말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내가 올 때 도로가 극히 평탄하여 여기에 이르렀다. 궁전 역시 장대하다. 이와 같이 ..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