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대기업의 한 경제연구소에서 진행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강의는 내게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 왔고, 강의를 들은 각 사의 임원급들은 네티즌들이 펌글을 옮기듯 구전으로 그 야야기를 옮기기에 여념 없었다. 나 또한 다른 장소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만큼 그 강사의 얘기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야기인즉,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첫 등반에 성공한 이후 2차 등반은 10년이나 지나서야 이루어졌는데 최근 들어서는 일 년에도 몇 명씩 등반에 성공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장비발달, 루트개척 등도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베이스캠프를 7부 능선쯤에 높게 치다보니 정상까지 나머지 3부를 정복하기 위한 시간과 기회가 훨씬 높아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예전에는 아래 3부 능선쯤에서 시작하던 정상공략이 요즘 들어서는 정상 가까이인 7부쯤에서 시작하다보니, 출발선부터가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이 점을 경영에 빗대 그는 기업이 경영목표를 높게 세우면 세울수록 성공가능성은 그 만큼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또한 목표를 높게 잡아야 그 이상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들어도 요즘처럼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해 있는 많은 경영인이라면 무릎을 칠만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분히 효율중시의 미국식 경영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같은 주장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늘 상시적 경영위기의 상태에서의 삶이 가위 누르고 있고, 이 같은 위기의식은 가히 요즘의 직장인들, 경영자들을 정신적 공항상태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 상황 하나만으로도 현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7부 능선에 치는 베이스 캠프’ 라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고, 심지어는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늘 현실이 어려울 때에는 무엇에든 붙들리는 법이다. 이것을 경영학은 매우 주도면밀하게 전파하고, 세일즈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그때 들은 ‘새로운 히말라야 등반방식’을 머릿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 때, 산을 밥 먹듯 타는, 그래서 네팔까지 다녀 온 산악인인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북한산 일대를 10시간가량 누비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제일 높다는 해발 840여 미터의 백운대를 오른 후 우이동 계곡으로 내려 와 소주 한잔 앞에 놓았을 때였다. 산악인 친구의 전문적 견해도 들을 겸, 요즘 유행하듯 등산과 경영의 크로스 오버(cross over) 같은 생각도 들을 겸, 묻는 나에게 그 친구는 뜻밖에도 전혀 다른 말을 불쑥 꺼냈다.


“그래도 엄홍길이가 사람은 됐어.”


산악인 친구가 뜬금없이 내 던지는 화두에 나는 일순 긴장했고, 그런 나를 떠보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이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때 내가 들은 그의 대답은 나로서는 효율만능주의나 심지어는 경영혁신의 기본 마인드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히말라야에 가보기나 하고 하는 얘기냐?” 나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라며 얼버무려 버렸다.


“자네 얘기처럼 7부 능선에 베이스캠프를 치기 위해 짐을 운반하는 세르파(짐꾼) 들이 얼마나 죽어 갔는 줄 아나? 높은 타킷을 정해두고 남이 짐을 운반해 주면 나머지 3부만 오르고 정상을 정복했다고 하면 산악인으로 좀 부끄러운 일 아닌가? 요즘의 등반가들이 하는 그 잘난 정상정복을 위해 7부까지 남루한 복장을 한 채 짐을 옮기는 세르파들의 죽음을 생각이나 해 봤어? 엄 홍길 대장이 얼마 전 그동안 자기가 등반할 때 4명의 세르파를 희생시켰는데, 앞으로는 자신의 등반을 위해 죽은 세르파와 그 가족을 위해 등반하겠다고 한 것은 이제 그가 사람이 됐다는 얘기네. 산을, 정상에 오르는 법을 아는 거라고 생각하네.”


그의 말은 내가 처음 ‘7부 능선 이론’을 들었을 때의 감동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서 나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대답은 다분히 경영적 관점에서 목표지향의 사고에 빠져있던 내게 다른 종류의 패러다임을 불러일으켰다. 이렇다 할 반박도 못한 채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에 오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산악인인 내 친구는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상을 오르는 진정한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목적 지향적으로 산에 오른다. 이런 마음의 자세는 정상을 정복하고 나서 더욱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성과 이외의 삶은 목표 없는 삶으로 치부되며, 경영지표만이 모든 것인 양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늘 접하는 경영환경이 이렇다. 인간중심, 직원중심 보다는 신자유주의의 산물인 주주자본주의가 탐욕스럽게 이 사회를 끌고 다니고 있다. 기업들은 다투어 과도한 목표를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경영효율성 제고인양 앞서거나 뒷서거니 하며 실천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런 식의 효율성이 잭 웰치식 선진 경영 기법으로 칭송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잭 웰치가 한 가장 큰일은 사람을 자르는 일이었다는 것을 왜 무시하고 있을까? 그의 별명이라는 ‘중성자탄’은 수많은 세르파, 즉 GE의 직원들을 희생시킨 댓가로 얻어진 것 아닌가?


오늘날 한국의 기업들은 10년 동안의 연례 행사인듯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그것은 외환위기 이후 생존과 관련된 매우 지난한 역사성을 지닌 경영용어가 되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다. 환란 이후 우리는 어디가 올라야 할 정상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오르고자 한 것은 아닌지. 이 사회를 양분시킨 극도의 상향식 경쟁구도가 경영자들의 마인드에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더구나 그것이 함께 오르는 공동의 등반이 아닌, 혼자 하는 등반은 아닌지 냉철히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적어도 우리는 자유스럽지 않을 것이다.


직원들의 소외감이나, 상시적 고용불안 상태가 일상인 삶에서 그렇다면 기업이 추구하는 혁신과 궁극적인 경영의 승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는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기업과 그 역할이 현실과 많은 점에서 불일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영자들은 안에서부터 직원들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애환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그저 평범하고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7부 능선까지 짐만 옮기는 세르파의 역할에 국한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21세기 들어 사회 한 축에서 활발하게 불붙는 나눔과 상생의 철학은 단순히 기능적 혁신을 뛰어 넘은 사회 전반의 구조적, 의식적, 체계적 혁신을 위한 틀이 되고 있다. 이 점은 오늘날 기업들이 추구하는 윤리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동시에 기업의 진정한 비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직 그 걸음은 초보 단계이다. 이 점을 우리는 올 한 해만 하더라도 여러 기업인의 사회적 일탈행태에서 발견하곤 했다.    


경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이를 함께 추구해 나가는 데에 본질적 역할이 있다. 새 판에서의 경영은 과거의 분별없는 카리스마가 칭송되던 때처럼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희생도 줄이고자 하는데서’ 출발한다. 직원들, 피고용자들은 격전의 경영현장에서 총알받이가 아니라, 운명공동체라는 보다 뚜렷한 가치 중심적 경영에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중요하다. 희생을 없애거나, 최대한 줄이면서 목표로 하는 경영성과를 이뤄내는 것이 탁월성의 경영이지,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더 큰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경영의 본질은 아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아독생(我獨生)’의 저급한 사고로는 앞으로의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혁신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가치’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는 점은 우리 사회가 새로운 경영의 단계를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한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오늘날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비정규직 문제, 상시해고의 위험, 성장정체의 심화 등 여러모로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경영자들의 해박한 지식에 있지 않다. 대신 대다수 직원들의 뜨거운 참여와 공존, 공영의 가치가 경영지식과 합치될 때 얻어진다.    


그간 한국 사회를 멍들게 한 수많은 서민대중들의 희생을 딛고 일어선 소수만의 부, 수많은 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몬 왜곡된 부가 얼마나 가치 있으며, 오래 갈 것인가? 언제까지 세르파들은 묵묵히 등짐만을 짊어지고 7부 능선이 아닌, 9부까지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올라가야만 할까?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산 중 길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될까?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경영자들은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북한산에 오르고서도 히말라야를 주제로 삼고 나눈 산악인 친구와의 대화는 내게 북한산 언저리를 내리 달리는 수많은 길처럼 많은 경영적 사념을 불러 일으켰다. 경영이란, 경영에 대해 별 관심도, 전공도 아닌 친구로부터도 듣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들려 준 이야기가 아직도 내겐 생생하다.


“혼자 올라가면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나? 다들 올라가자마자 환호성 지르고, 그 다음엔 황급히 쫓기듯 내려오는 것이지. 무엇이 정상 정복인가? 같이 오르지 않으면 사는 재미도, 오르는 재미도 별로 없을 텐데. 더구나 히말라야든 어디든 늘 해는 정해진 시간에 지게 되어 있거든. 어둠이면 더욱 함께 할 친구가 생각나는 법일세...”


그의 애기를 듣는 동안 나는 낮에 보았던 대동문, 동장대 등지에서 만난 일군의 산행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북한산은 힘들기로 하자면 만만치 않지만, 한편으론 운동화 신고도 오를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잠시 휴식 차 배낭을 내려놓은 곳에는 여러 회사의 나들이행 산행자들이 눈에 띠었다. 그들은 서로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 하며 호칭을 부르고, 어깨동무를 하며 활짝 웃은 채 사진을 찍었다. 작은 성취였지만, 그들은 여기까지 함께 올랐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역력했다. 누가 봐도 그들의 차림새로는 눈 얼은 백운대까지 올라가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오른 곳에서 그들 회사의 경영자가 고민하는 직원 간 의기투합이나, 함께 하는 혁신 마인드가 엔돌핀처럼 돌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효과는 북한산 한 자락을 딛고 서서도 히말라야를 오르는 깨달음보다 더 큰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산악인 친구가 내게 들려 준 마지막 말인, 해가 지면 더욱 벗이 그리워 질 거라는 얘기는 끝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IMF 이후 해 오지 못한 것이 이것이었다. 보통의 직원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직원들은 틀림없이 회사를 밑에서부터 받치는 세르파 와도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웅은 아니지만, 정상 등반이 성공리에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다 해 내는 진정한 영웅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을 대할 때 그들과 함께 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진정한 혁신은 한낱 구두선에 머물 것이다. 극한의 밤중에 히말라야에서 평범한 짐꾼들의 체온이 그리울 때면, 우리의 경영자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전경일, 능륭협회, <혁신리더>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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