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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거대한 비구름이 네 앞에 몰려오는 것을 보라

by 전경일 2009. 2. 3.
 
내가 십 오 년 전 쯤에 미국의 한 대학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멀쩡한 날씨에 차를 몰고 멀리 여행을 가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포장도로는 홍수가 날 정도로 물이 불어 올랐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서 나는 기겁을 했고, 한편으로 장엄한 자연 현상에 놀라서 하늘과 땅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30여 분 만에 비가 그쳐서 다행이었지 계속 퍼부었다면 차와 함께 나는 급류에 휩쓸렸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지만 미중부 지역은 갑작스럽게 토네이도가 몰아치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륙형 기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장엄함과 규모의 방대함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웅장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때의 장면을 지금도 가끔 떠올리곤 한다. 개인적으로 적잖은 변화가 있을 때에는 몰려오는 비구름을 보는 것 같고,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조류를 직시할 때에도 그 같은 현상을 보는 듯하며, 지금처럼 직장인으로 살면서는 조직내ㆍ외적으로 접하게 되는 변화의 국면마다 하늘을 가득 뒤덮는 비구름떼를 보게 된다. 그 같은 오래 전 이미지는 현실을 모사할 때에도 내게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경험은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 변화는 너무나 급격해 토네이도처럼 한순간 고정된 사물과 우리 의식을 빨아올려 하늘에다가 내동댕이 쳐댔다. 지금 우리에게 덮치는 이 비구름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글로벌 경쟁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이 보다 더 크고 강력한 메가트랜드는 지금까지 없었다. 현재까지의 교역 방식, 재산의 증감, 기업과 개인이 처하게 될 위기와, 새롭게 등장하는 기회 등등. 모든 게 글로벌 환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기란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을 선택해야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빠르게 개방화되고 있다. 친자본적이다. 90년대 초 동구권이 개혁ㆍ개방을 부르짖은 이후 제2차 빅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이제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 포장을 뜯어낸 투명박스처럼 속을 낱낱이 들여 다 볼 수 있는 경쟁구도가 우리 안방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대한민국 지방도시의 어느 슈퍼는 외국자본이 참여한 대형마트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문 닫게 되고, 중소기업의 일꾼들은 하룻밤 만에 일터를 떠나야 하고, 공장에 남아 있던 구식 장비들은 헐값에 중계인의 손을 거쳐 베트남으로 수출되어 간다. 한국 최고의 서울대는 그저 로컬의 한 대학 정도로 쪼그라들 위기에 처해 있고, 신분을 보장받던 고시합격자의 인생은 로스쿨의 등장과 함께 치열한 밥벌이 경쟁에 돌입한다. 누구도 사방천지에서 날아오는 세계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이미 잽 수준을 넘었다. 강력한 훅이나, 체중이 실린 어퍼 컷 수준이다. 21세기 들어 농촌에서의 자살은 세계화와 가장 밀접하다는 연구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단일 민족 개념은 이미 농촌에 유입된 백여만명의 외국인들에 의해 유전자 조합이 벌어지고 있다. 인종조차 뒤섞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대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인류학에서는 오래 전 원시인류에 대한 연구가 불붙었었는데,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될 것 같다. 호모 사피엔스의 ‘사피엔스(sapere)’는 ‘세계를 맛본다’는 뜻이다. 학자들이 왜 그 같은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기에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생존을 가능케 한 그 신세계란 무엇이었을까?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방하기나 간빙기, 혹은 그 두 시기를 건너 뛴 시점 아니었을까? 지금의 ‘글로벌 환경’이 그와 비슷하다고 본다. 절대변화의 시기, 전국면ㆍ전시기에 걸친 변동의 시점이 그것이다. 

지금 기업들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값싼 노동력을 찾아 현지에 공장을 세우던 기업들은 아예 본사를 사업하기에 우호적인 국가로 이전도 불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래 전부터 본사이전에 대한 국내 반응을 떠보아 왔다.(물론 이는 현실적 이유로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특히 자본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지 이미 오래이다. 두바이는 조세혜택을 받으려는 페이퍼 컴퍼니를 국왕이 직접 나서서 유치하고 있다. 자본만 돌아가지 인력이나 시설은 필요 없다. 미국 고객의 불만을 응대하는 콜센터는 영어가 쓰이는 인도에서 그 시간 누군가 전화 받으며 처리되고 있고, 소프트웨어 개발은 본사 직원의 야근 없이 12시간 시차가 나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아침 출근조가 맡아서 24시간 2교대로 처리하고 있다. 가격은 인터넷상에 실시간으로, 더구나 전 세계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그에 맞춰 오프라인 매장들은 살기 위해 한 푼 더 내려야만 고객을 붙잡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세계화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는 이미 우리 몸을 이루는 것부터가 외산 일색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미국 내수 산업의 붕괴를 단적으로 드러내준 말로 ‘Made in USA가 사라진다.’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중국산 장난감에 공급문제가 생기면 아이들한테 돌아갈 크리스마스 선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이 모두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꼭 그렇다. 우리의 먹거리의 80퍼센트는 이미 외산이며, 우리가 회사 근처에서 사먹는 갈비탕은 이미 중국산 저가 통조림이다. 기업들은 다투어 아웃소싱을 하고 있고,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에 의해 내 일자리가 날아갈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암시한다. 세계화의 문지방만 넘으면 이런 일이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며 많은 기업들이 날아가기도 하고, 더 크게 몸집을 불려 가기도 한다.

이런 변화무쌍한, 상시변화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뭐든 가격과 조건만 맞으면 재화는 그쪽으로 움직인다. 흡착력 강한 빨판시대, 거대한 불균형의 시소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 초강력 자석이 일으키는 자장권 내에 누구든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기업들은 가장 정면에서 이 같은 세계화의 혹독한 바람을 맞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미 롤로코스트에 올라 탄 것처럼 끝을 봐야만 멈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우리는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 있거나 버텨야만 하는 게 지금으로선 숙명처럼 느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리적으로도 전통적으로 우리가 가슴에 품던 조국의 개념은 사라지고, 글로벌이 조국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비유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우리의 의식과 활동을 지배한다.

이런 시기에 직장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더욱 더 몸이 웅크려지고 자신 없어 지는가, 아니면 신들메를 고쳐 신고 세계를 향해 도약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가?

어느 시대나 과거의 낡은 가치로는 새로운 시대를 대변할 수 없다. 새로운 생존 조건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는 데서 출발한다. 여러분이 똑똑한 직원을 넘어 글로벌 인재로 거듭나야만 하는 가장 명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을 멈춰 세우지 않는 한, 혹은 세상이 알아서 멈춰 주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은 세계화의 격랑 속에 매일 동승해야 한다. 좌초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직장-직업에 대한 기존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인식의 틀을 짜야만 한다. ‘세계화를 덫’이라고 인식되더라도, 그 덫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내부적으로 세계화를 통해 더 큰 대항능력을 키우는 것이어야 한다. 10여년 전의 외환위기는 우리가 세계화가 뭔지 최초로 따끔하게 맛을 본 사건이었으며, 미래의 가시적 위험에 대한 항생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의 교훈을 새기지 못하는 개인, 기업, 국가는 솨락의 길로 한없이 접어들게 될 것이다. 지금은 분수령 한가운데 있다.

이미 막을 수 없는 것들을 더는 먹히지 않는 방법으로 계속 시도하는 것은 단언컨대, 미친 짓이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서방 기업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그곳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중국이 개방화되며 서구 자본이 물밀듯이 들어갔을 때 이미 시장은 세계화의 숙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다리가 걸쳐진 크랙 위에 오늘의 한국 기업은 놓여있는 것이다.

비바람이 그치고 나면 가장 청명하고 화창한 날씨가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시점이 언제일지, 지금보다 더 좋을지 열악한 환경이 찾아올지는 지금으로선 예측할 수 없다. 아마 우리는 매일 아침 회사 옥상에라도 올라가서 까치발을 하고 폭풍우와 파고가 얼마나 높을지 예측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경쟁이란 모든 것을 경쟁 상태로 끌어들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과 사를 결정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세계화에서 상생철학은 극히 이상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것은 원시시대의 소도(蘇塗)에서나 있을 법한 상상이다. 이제 우리가 직장에서 맞이할 앞날의 생존의 방식은 지금과는 많은 점에서 현격히 다를 것이다. 몰려오는 비구름떼를 피하기 위해서는 예측능력을 키워야 한다.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그때 가서 피한 장소를 찾는다는 건 더욱 어려워 질테니까. 그건 이미 멸종한 네안데르탈인들이 보여준 방식일 뿐이니까. ⓒ전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