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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베토벤의 오류를 아십니까?

by 전경일 2009. 2. 3.
 
착각은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가 주요 의사결정에 개입되면,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오고, 끝내 조직은 되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불러온다. 여기 위대한 착각 중에 하나가 기업이란 조직에, 일상의 업무에 견고한 벽을 만들어 내며 흡착되어 있다. 이로 인해 명징한 현실 인식은 백안시되고, 조직은 환상과 신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현실과 사물, 그리고 인간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착각 - 베토벤의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베토벤의 ‘운명’을 들을 때면 그가 대단한 저택에서 이 곡을 작곡했고, 때로 작곡을 하다가 골치가 아플 때면 천둥치는 정원으로 나가 멋지게 바람을 쏘이며 신의 계시와 같은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사실은 낡은 하숙집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성공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다. 단언하자면, 성공착시에 훈련된 결과다. 뭔가를 덧칠하지 않으면 평범성을 견딜 수 없어하는 인간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작용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성공한 사람과 조직에도 종종 따라붙는다.


그 예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하고 나면 그 결과에 대해 신화를 불어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보통사람이 아니었지, 원래 우리와는 달랐어, 남 다른 사람이었지, 빼대부터 달라...‘ 등등. 평범성이 아닌, 남다른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리하여 그가 성공해야 할, 그 기업이 잘 나가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심지어는 성공의 필연적인 이유를 없어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그저 ’그때 그런 일을 했고, 그것이 운 좋겠도 자기 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탁월한 혜안이나, 통찰력 같은 건 실망스럽겠지만, 뜻밖에도 없다. 오히려 약싹 빠르게 행동하거나, 노회하게 굴거나, 남보다 약간 머리를 더 쓰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룬 성공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남보다 좀 더 일하고, 머리를 쓰고, 행동에 옮기고, 하는 것들은 대단한 능력이다. 생각만 하고 마는 것과는 분명히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차별성, 탁월성에 대한 평가는 그 정도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울긋불긋 덧칠된 신화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일상이 아닌 특수성, 평범이 아닌 비범성에서만 원인을 찾게 되고, 치장되기조차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일상에서 탁월함을, 평범에서 비범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파묻혀 버리고 만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들어 경영학계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세계화로 대표되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은 경영의 주술사들을 다시 들깨웠고, 그들은 주술의 레퍼런스를 찾아 ‘베토벤의 오류’를 다시 꺼내 들었다. 성공한 기업이나 기업가는 치장되었고, 표백되었으며, 우상시되었다. 나아가 벤치마킹이나 모범적인 케이스 스터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30년 동안 숭배되어 온 대다수의 위대한 경영자들과 기업들이 대부분 초라하게 몰락했다는 점은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경영의 약장수들은 나팔을 불어대며 경영자들을 끌어 모았다. ‘핵심인재만이 회사를 살린다!’ ‘1명의 핵심인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 ‘핵심직원만 빼고 나머지는 다 아웃소싱하라.’ 등등.


그들의 주문은 미신을 불러내는 효과와 공포감을 자아내며 경영자들을 외따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그 결과 경영 현장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위대한 환경에서 작곡을 한 사람으로 윤색되었다. 이 위대한 작곡가가 얼마나 일상적이며 평범한 생활 속에서 위대함을 잉태해 냈는지는 생략된다. 평범을 죽인 끝에 그들은 신화를 창조해 냈고, 이는 경영현장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 결과 하나의 신화를 위해 기업의 주축이 되는 대부분의 평범한 보통직원들은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오늘날 기업들은 그들이 정작 돌아가야 할 곳이 주주나 재화만이 아닌, 보통의 직원들이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조직내 풍성한 경험과 보통이 지닌 성실성을 따라 잡을 ‘가치’란 별로 존재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조직이란, 구성원들의 집중된 역량을 통해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바를 성취하는 곳이다. 어떤 개별적인 탁월성도 조직 전체의 탁월성을 앞설 수는 없다. 그러기에 보통의 직원들은 리딩되는 대상이 아닌, 리드하는 집단이다. 그런데도 왜 경영자들은 그들에게서 베토벤의 고유한 숨은 재능을 보려하지 않고, 그의 작품을 들으며 착각에 빠져드는 것일까?


그것은 본질보다는 현상에 집착하는 표피적 경영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단을 전체적으로 키워내고 조직 전체의 역량을 높이는 일은 대단히 수고스럽고, 결과가 장기적으로 드러나기에, 어느 한 둘의 신화를 끌어 다 대체하고 싶어진다. 단기효과의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삼호실업 문 형태 과장은 소수에 의한 소수의 정치가 조직 내에서 팽배해 질  때, 대부분의 직원들은 줄을 서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조직은 안으로 곪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휘둘리는 그들이야말로 휘둘려서는 안되는 가장 튼튼한 기업의 보루라는 것을 오늘날 경영자들은 얼마나 알까? 쉽게 대체가능하다는 생각, 그들이 보여주는 능력이 기능적이라는 생각이 더 큰 기업으로 조직이 발전해 나가는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 이런 왜곡된 생각은 직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경영자의 생각에서 나온다. 뭔가를 들어내고, 뜯어 고치면 대안이 될 것으로 믿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밑바탕을 흔들면서도 옥상의 사과가 그대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도할 정도로 엘리트 주의가 팽배해 있다. 모든 면에서 소수를 위한 사고와 생각이 전체 사회나 기업의 역량을 배가시키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보통의 직원들은 쉽게 아웃소싱되고 계약직으로 밀려난다. 단기적 효율성 측면에서만 보면 이는 비용절감이라는 면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 내 고스란히 쌓여야 할 지식역량이나, 가치, 기업문화, 풍토 등은 정착되지 못하고 부유하거나 한방에 날아가 버린다. 그 결과 기업은 장기적인 가치를 잃게 된다. 경영의 생태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 식물들, 생물들이 어울려 살 때 상호간에 상승작용도 일으키고, 길항작용도 일으키며 숲을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간과하고, 멋진 숲을 바라는 것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외환위기 10년이 지난 지금, 대체로 한국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고, 벌어진 일들은 무엇인가? 단절이었다. 단절은 혁신의 동의어가 아니다. 단절은 한국형 경쟁력을 송두리 채 앗아가고, 기업 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만들며, 수많은 기업범죄를 만들어 냈다. 장기적인 경쟁력이 될 수 없는 선택을 한국 사회는 지난 10년간 신들린듯 수행해 온 것이다. 경영의 주술사들은 베토벤은 뭔가 다르다는 신화를 심어주며, 경영자들에게 보통이 지닌 가치에서 눈을 떼도록 종용했다. 그리하여 될 성 싶은 떡잎을 장기적 안목으로 키우려는 노력보다는 화려한 장식에 눈멀도록 했다. 기업의 메커니즘상 다 짜를 수는 없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던 보통직원들은 그 통에 자신에 대해 보다 영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베토벤의 ‘운명’을 싸구려 하숙집에서 쓰며,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돌아보게 된 셈이다. 그 결과 직원들은 더 약아지고, 이기적이 되는 진화의 법칙을 선택했다.


한국기업이 지닌 조직적 역량은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쇠퇴했다. 과거 10년 전의 조사와 비교해 볼 때 조직에 대한 로열티는 현격이 떨어졌고, 기업과 동고동락하는 의식은 정서적으로 한시적 동거상태일 뿐이라는 생각을 내면에 갖도록 했다. 누구든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관계에서는 설령 지금 같이 살아도 짐을 다 풀지는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직원들에 대해 취한 태도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만남과 작별의 법칙을 알려준 셈이다.


베토벤의 오류는 폐기되어야 한다. 베토벤은 그 환경의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인해 운명같이 ‘운명’을 작곡해 낸 것이 아니다. 일상적이며, 평범하며, 상식적이며, 생활인으로서 그는 살면서 내면의 위대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직원들 내면의 탁월성을 읽지 못하는 경영자는 외면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직원들의 의욕이나 사기를 움추러 들게 되고, 결국엔 조직적 역량의 저하로 나타나게 된다.


베토벤의 운명을 들을 때면, 나는 이 위대한 작곡가가 가장 평범한 환경에서도 극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낸 원동력이 뭘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 그건 극히 평범한 일상을 자유자재로 누리고, 마음으로 그 세계를 받아 들였기에 악보를 그려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평범함은 얼마든지 위대성을 실천해 드러내 줄 수 있다. 베토벤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운명’은 오늘날 경영 현장에 또 다른 메세지로 다가오고 있다. 만일 그대가 듣고자 한다면 새로운 운명이 경영자와 그 구성원들에게 들려올 것이다. ⓒ전경일, 능률협회, <혁신리더>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