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024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7) [우리 생각을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말을 한자로 적다가 조선에 이르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마저도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하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다보니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으로 우리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말이 아니어서 우리의 생각을 우리 식대로 올곧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때 글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아무나 글을 알아서도, 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고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뭇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신비한 신적(神的) 존재로 인식될 만하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문맹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그것이 세종이 국가 CEO가 되면서 맞닥..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6) [마침내 비밀 TFT의 존재가 드러나다! ] 「훈민정음」창제와 관련되어 중요한 기관의 하나가 ‘언문청(諺文廳)’이다. 이 조직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세종 26년 실록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의사청(議事廳)’이 ‘언문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언문청이「훈민정음」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무 기관이라면, 그것은 적어도「훈민정음」원안이 창제된 세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이미 조직되어 활동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세종 28년 11월 8일에 가서야 실록에는 ‘언문청’이 설치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다는 점이다. 세종 28년 11월은「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세종 28년 9월)된지 2개월 후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을 다 만들어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5) [경험을 아웃소싱하라] 이 무렵 요동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유배와 있었다. 그는 티베트 문자 계통인 파스파 문자에 대해 음운학적 조예가 깊었던 학자였다. 알다시피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몽고)의 원세조는 1269년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로 하여금 범어 계통의 음소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바탕으로 음절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이 문자를 개발한 목적은 여러 민족들이 쓰는 다양한 문자를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세종이「훈민정음」을 창제하기 150년 전의 일이다. 세종은 이를 연구시켜「훈민정음」개발에 벤치마킹 사례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은 음소문자로서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점, 아래로 내려 쓰는 점 등에서 유사점을 보..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4) [개혁에 대한 기득권층의 태생적 한계]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최만리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방법으로 오픈 O/S인 한글 발표를 반대한 것이 설령 아니라고 가정할지라도, 그 같은 반대론자에게「훈민정음」은 한자와 글자 모양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말 글자 같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지식 계급의 맹목성은 바로 그런 까닭에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사고의 배경이 ‘한자’의 범위내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작성해 백성에게 배포한 것에 대해서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뒤에 오히려 충신ㆍ효자ㆍ열녀가 배출되지 않았다”며,“하필 언문으로 이를 옮긴 뒤에야 사람들이 이를 본받겠느냐”..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3) [백성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라] 그렇다면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과 소통의 수단을 제공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세종은 한자에 주목했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우리 글이 아닌 문자가 우리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개발은 이러한 냉엄한 현실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자는 그 이질성 때문에 우리의 느낌과 감정의 깊은 곳까지 올곧고 섬세하게 담아 내지 못했다. 또한 복잡하기만 했다. 한자 문화의 영향 속에서 자라나 그것을 자신의 지적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세종은 그것을 치장하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세종은 이미 600여년 전에 현대적 경영 이론이기도 한, 복잡함은 결코 단순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원리를 잘 알..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2) [억만년 소통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라]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근본적인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 한, 그 ‘근본적인 문제’는 미결 상태로 남아 나중에 반드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경영상의 주요 문제에 대한 미결 상태는 후세에 가장 ‘치명적인 짐(fatal burden)’이 되어 버린다. ‘한글’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만일 ‘한글’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문자 체계나 그에 따른 기록 방식 그리고 모든 언어 및 문자적 표현 행위는 심각한 장애를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이 하나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 또한 심각하게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한글’이라는 문자(文字)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을 뛰어넘어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