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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39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일본 막부시기, 무용(武勇)을 과시하며 할거한 봉건 영주들은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차지하기 위해 해적단을 해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왜구는 고려를 비롯해 명나라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출몰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나아가 일본 봉건 영주들과 상인들은 해적떼를 지지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왜구는 이처럼 일본 지배계급과 연관된 해적떼이며 침략 집단이었다. 왜구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발생한 약탈집단이 아니라, 일본 봉건제도와 상업자본의 발전이 왜곡되며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자, 침략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1380년대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 왜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일본 내 민간 활동인 ‘잇키(一揆)’의⟨야토(夜討)·해.. 2017. 2. 10.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 왜구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 정부의 왜구 금압 요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왜구 문제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압을 요청하는 고려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 조정의 공식 입장은 “회답하지 않고 막부의 처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1368년 1월 중 승(僧) 본토(梵盪)와 본류(梵鏐)를 고려에 보빙사로 보내 막부의 회답공문을 바쳤다. 하지만 막부의 회답은 고려 정부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왜구가 규슈, 시코쿠(四國) 등지에 할거 하고 있는 무리들이어서 교토의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아시까가.. 2017. 2. 3.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2017. 1. 24.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한중일 간에 있어 왔다. ‘왜구’라 함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고려사》는 왜구의 주체 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일본 사신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공민왕 17년인 1368년, 왜(倭)의 승려 본토(梵盪)와 본류(梵鏐)가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왜구 금지[禁寇]를 요청하는 고려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 회답[回書]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지금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377년(우왕 3년) 6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이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갔던 첩장(牒狀)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첩장에는 고려 금룡(金龍)이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한 회답으로 왜측의 세이.. 2017. 1. 13.
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 - 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1592년 임진왜란 징후 파악과 발발에 대해 조선 정부의 대응은 무능한 것이었다. 인접 국가인 일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세히 탐망하고 방비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방비를 게을리 한 탓에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화를 겪는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선조 23년) 3월 조선정부는 왜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사절단의 파견 목적은 토요토미가 전쟁을 수행할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윤길과 김성일간 상반된 정세예측 보고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이 시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일본 내부의 사정에도 눈이 어두웠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2015. 12. 30.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2015.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