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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39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한중일 간에 있어 왔다. ‘왜구’라 함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고려사》는 왜구의 주체 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일본 사신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공민왕 17년인 1368년, 왜(倭)의 승려 본토(梵盪)와 본류(梵鏐)가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왜구 금지[禁寇]를 요청하는 고려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 회답[回書]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지금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377년(우왕 3년) 6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이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갔던 첩장(牒狀)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첩장에는 고려 금룡(金龍)이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한 회답으로 왜측의 세이.. 2015. 12. 30.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료순의 정치공작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료순의 정치공작 1350년 ‘경인년 왜구’ 이후, 1360년대에는 왜구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이 시기를 지난 1372년부터 고려에 왜구가 갑자기 크게 출몰한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시기는 1371년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내려온 다음 해라는 특징이 있다. 왜구 재출몰은 이와 관련있다. 일본에서는 남북조 내란 말기에 북조(北朝)의 3대(代) 쇼군 아시카라 요시미츠(足利義滿)가 남조가 장악하고 있는 규슈를 탈환하기 위해 1370년 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탐제로 임명한다. 탐제(探題)란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대 주요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을 말한다. 다음해 료슌은 일족의 장군들과 함께 규슈에 상륙해 이곳의 지.. 2015. 10. 20.
일본의 재침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의 재침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일본은 한반도를 주기적으로 침략해 왔고 지금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은 한반도 재침을 획책하고 있다. 일본은 대륙진출이라는 광포한 욕망으로 1620년간 한반도를 자그마치 900여회나 침략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래 없이 긴 ‘전쟁’으로 지금도 현재진행형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치밀하고 집요한 한반도 공략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인식은 고사하고 MB처럼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는 부왜적(附倭的) 사상이 극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사에 이 같이 망국적 발언이 횡행한 적이 있던가? 21세기 들어서도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처럼 역사도 탄생기, 성장기, 전성기, 쇠락기가 존재하지만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에는 .. 2015. 9. 25.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세계제국 ‘원’의 침공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세계제국 ‘원’의 침공 이처럼 왜구를 무한 복제해 내는 일본 내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왜구가 우리나라에 대거 침구한 때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시대와 남북조시대였다. 일본 중세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는 1185년 헤이시가(平氏家)를 멸하고 전국적인 지배망을 구축하게 된다. 이때 막부는 ‘수호와 지두(地頭)의 제(制)’를 실시한다. 수호(守護)란 모반, 살인자 등을 관장하는 관리를 뜻하고, 지두란 장원의 관리, 조세의 징수, 치안의 유지를 맡아 보는 직책을 말한다. 이는 미나모토노가 내란에 참가한 무사 계급을 주종 관계로 묶어 지배 질서를 확립한 것을 뜻한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정권은 처가 쪽인 호조씨(北條氏)에게.. 2015. 7. 29.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2) 지금 일본은 2차 대전 이래 가장 뜨거운 극우주의 열기로 들끓는 가마솥과 같다. 경제 성장이 가져온 경제대국화와 일본 내 경제적 불안정성과 잦은 자연재해, 그리고 잇따른 인재(人災)는 이 가마솥이 폭발의 행로를 찾아 새로운 팽창주의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팽창 기조를 일본은 1823년 사토 노부히로가 제안했던 ‘울릉도·독도 공략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독도문제의 역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왜구와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 지금의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서로 빈틈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왜구를 다루는 것은 일본의 침구가 끝내 일본은 물론 주변 국가 모두의 불행이 되어 온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나아가 이 일이 단지 과거의 불행으로 국한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 2015. 7. 20.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1)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조큐의 난(1)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명문(銘文) 이후, ‘왜구’가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1152년이다. 일본 측 자료인《청방문서(靑方文書)》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고려를 대상으로 해적활동을 한 집단에 대한 최초의 증빙이 엿보인다.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長崎縣)의 서쪽에 위치한 고토(五島)의 장관격인 지두(地頭) 기요하라 고레카네(淸源是包)가 고려 선박을 탈취한 혐의로 영주로부터 예소직(預所職)을 박탈당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왜구가《고려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대략 70여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해상 무사단’의 활동 지역이 일본열도 내 바다를 넘어 멀리 고려 선박을 대상으로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왜구가 어떻게 활.. 2015.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