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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129

[창조의 CEO 세종]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 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세종은 효과적인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아웃소싱 했다. 그것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이슬람 세계의 문명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고려’도 세종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금쪽같은 아웃소싱의 대상이었다. 고려 때 세계 최초로 개발된 금속 활자는 조선에게 커다란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활자는 전임 CEO 인 태종 때부터 개발 프로젝트로 잡혀 있었다. 그 당시 태종은 지배층들의 강력한 반대 -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들은 남들이 지식으로 무장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들에겐 언제나 민중의 ‘지식’이 가장 강력한 위협 요소로 인식되는 것이다. - 를 물리치고 계미(癸未) 청동 활자를 주조하고자 했다. 태종도 13세기 고려에서 발명되어 겨우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청동 활자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하나의 성공은 다른 성공을 리드한다 [농업을 백업(back up)하는 기술을 개발하라 ] 세종시대에는 생산성 증대 정책과 더불어, 이를 강화해 주는 각종 개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이집트ㆍ그리이스ㆍ로마 시대로부터 축적된 과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핵심(core) 기술이었다. - 나일강의 삼각주를 측정하던 수학적 원리와 바로 그런 배경에서 개발된 다양한 기기들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시기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선에 건너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결코 그 자체로 적용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려 때부터 쌓아 온 우리의 자생적인 과학기술과 합쳐졌다. 다시 말해 한국 기술과 외국 기술이 합쳐지는 퓨전, 즉 기술 융합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준비된 우리의..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R&D만이 살 길이다 고려를 대신해 조선이 창업되게 된 배경에는 피폐한 국가 경제가 큰 몫을 차지했다. 고려는 토지 정책에 실패해 국민경제가 피폐해졌고, 농업 생산성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의 국가 경영층들은 나라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고려가 망한 이유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으로써는 창업 후 생산성 극대화 방안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실질적인 성과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 그리하여 태조는 먹고 입고 사는 소위 생활에의 문제와, 교육문제가 신생 조선이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조 이성계가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본(本)이며, 학교는 개화의 원(原)이다.(태조 4년 1..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끈기와 노력이 함께 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2) [편집증 환자들이 결국 뭔가를 이루어 낸다] 이렇듯 세종 자신의 노력과 각 프로젝트 진행 과정상에 드러나는 리더십은 실로 세종 자신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가 박연의 경우였는데, 그는 세종에게 발탁되어 관습도감 -조선 초기 음악을 가르치던 기관 - 의 제도라는 직책을 맡아 평생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그는 “앉으나 누우나 늘 가슴 사이에 두 손을 포개고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12율) 소리를 내곤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기업에서 얘기하는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박연이 음악 제정 프로젝트에 기울인 정성은 실로 놀라웠고, 이에 대한 집중력은 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기를 십여 년 만에 그는 드디어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끈기와 노력이 함께 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1) 우리 역사에서 세종만큼 확고한 국가 경영 마인드와 강한 의지로 국정을 밀고 나간 CEO도 없었다. 조선 초에는 실로 국가다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대역사(大役事)가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청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세종은 신생 조선의 골격을 당대에 온전히 갖춰 놓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실로 한 사람의 시대에 이루어지기에 믿어지지 않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모든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복합적으로 수많은 사업을 추진해 나가며 성공한 예는 일찍이 세계 역사에서 찾아 보기 매우 힘들다. 세종이 재임했던 32년 기간 동안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사업들은 국가와 민생을 위해 하나같이 중요한 국가 인프라 구축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같이 단기간에 이룩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간의..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성공이 쉽지 않음은 병이다 [성공을 측정하라] 세종은 실무형 전문가들을 발굴해 일을 맡겼다. 그래야 결과도 빠르고, 확실했다. 그는 새로운 인재들을 집현전과 여타 부서로 배치시 그들에게 ‘우리는 이미 성공한 팀이며, 너의 능력은 이 어려운 과업을 충분히 해 낼 만큼 인정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누구도 낙오자나, 회의론자가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세종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성공을 관리하도록 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한계를 긋지 않도록 했다. 세종의 이러한 점은 실제 그들의 성과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인재양성의 총사령관인 세종은 스스로 자기 일에 한계를 모르는 철의 두뇌 집단이자, 각 프로젝트를 위한 강력한 테스크 포스팀(TFT)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시대 음악업적에 절대적인 역량..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