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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129

[창조의 CEO 세종] 차기 CEO 선정에 결코 소홀하지 마라(1) 세종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 선정 문제였다. 전임 CEO인 태종은 비록 ‘피의 경영’을 했지만, 후임 CEO만은 제대로 뽑고, 키워 주었다. 그것으로 태종의 허물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회복될 수는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 시대보다 그 뒤의 시대가 훨씬 더 발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후계구도에 대한 전임 CEO의 ‘공(功)’과 ‘능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종은 ‘성공’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와 달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세종은 이 부분에서 너무나도 큰 실수를 범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종, 후임 CEO 선정에 실패하다 세종이 후계자 선정에서 실패했다는 얘기는 태종에서 세종, 그리고 문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후임 CEO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나는 조선의 CEO다(2) 3면이 바다, 조선 강국이 되자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다. 세종은 조선 선박에 비해 일본 선박이 경쾌하고 빠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 원인을 분석하여 조선 기술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세종 27년에는 일본 기술자를 초빙 귀화하게 해 ‘호군(護軍)’의 벼슬을 주어 배를 만들게 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호군(護軍)’이라 함은 당시 장군(將軍)급의 정사품의 무관직이었음을 볼 때, 세종이 인재 영입을 위해 얼마나 발탁 인사조치와 해외에서조차 인재 스카웃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기업들이 해외에서 우수한 인력을 스카웃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또 여러 외국 선박의 특징을 비교 연구하여 외국 기술의 장점을 도입했다. 결국, 전함(戰艦)의 수리와 운수(運輸)에 관한 일을 맡은..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나는 조선의 CEO다(1) 세종이 신생 조선의 CEO로 취임하게 된 15세기는 그야말로 대변혁의 시기였다. 세계사적 격랑 속에서 스스로 바로 서지 않으면 영구히 자주성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은 고려를 대신해 새롭게 일신해 창업했으나, 결코 강대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우리 민족은 대륙을 잃은 아픔을 지속적으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잠깐,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의 위화도 회군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은 대륙 도모를 포기한 대신 창업된 국가였다. 조선은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고 창업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북쪽으로는 강한 중국이 있..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세종대왕은 르네상스형 CEO(2) 회화와 도자기 분야 한편, 이러한 르네상스를 맞아 세종시대에는 회화 및 도자기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특히 회화 분야에서는 산수화가 안견(安堅), 사대부 화가 강희안(姜希顔), 세예가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거장에 의해 조선 초기 대표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안견에 의해 형성된 화풍은 후대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종은 시와 그림에 있어서도 당대 제일의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이르러 군왕이 스스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세종대왕과 정조 대왕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초년부터 송설체(松雪體)의 요체를 터득하여 명필로 소문날 정도였고, 그의 그림 - 그는 주로 묵란(墨蘭)을 잘 쳤는데, 신하들을 비롯 간혹 몇 몇 사람들에게 그려주기도 했다. - 은 화격(畵格)..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세종대왕은 르네상스형 CEO(1) 세종은 ‘사람 복’ 많은 CEO 세종은 정말 ‘사람 복’도 많은 CEO였다. 하지만 세종시대 인재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CEO의 눈이 있어야 했고, CEO의 관심과 이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했다. 세종은 이것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세종은 정말 뛰어난 음악적 소양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음악 정비를 직접 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음률을 조금은 이해하므로 제사 때를 당하여 들으면 웃을만한 일이 많다.”(세종실록』 27년 6월 경신) 라거나, “나도 음률을 제법 아는데 지금 연향 할 때에 남악(男樂)이..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온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신년연주회 티켓 구했어? 새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1433년 설날 아침에 궁궐에 마련된 특별 연주회장에서는 신년연주회가 장중하게 열렸다. 연주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 이날의 성공적인 행사로 박연이 포상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 이것은 실로 음악 분야에서 한국 고유의 음악이 새로이 열리는 팡파레와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수많은 악사ㆍ악공을 지휘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박연이라는 희대의 음재(音才)와 음악적 역량에 있어 결코 박연에 못지 않은 -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박연보다 더 뛰어난 측면이 있는 - 세종이라는 총괄지휘자가 있었다. 세종의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은 1433년에 피크(peak)를 이뤄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요를 수집하도록 지시한다. 세종이 주도한 이..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