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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195

[창조의 CEO 세종] 역사속의 CEO육성론(1) 묻건대, 경영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명쾌하게 답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터. 수많은 시행 착오와 판단 미스, 그리고 성공과 좌절을 동반하는 창업과 수성의 역사가 경영행위 아닐까? 과거의 사례가 있으면서도 후대에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게 있다면 바로 경영이 아닐까 말이다. 무릇, 모든 기업(起業)에는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역사가 있을 터. 창업은 천하의 패권을 움켜 쥐려는 욕망의 발현이요, 수성은 이를 지키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탄생과 소멸의 역사, 즉 창업과 수성이 반복되는 한편의 대 파노라마인 셈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영욕은 기업 경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같다. 이런 본보기를 우리는 15세기 신생 조선의 역사에서 찾게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숨막히는 4군 6진 작전: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라!(2) 어디 그뿐이랴! 내친 김에 세종은 북방 영토 개척을 위해 김종서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동북경(東北境)은 공험진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 지 오래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상고하여 보면, 장백산 북쪽에 있다고 하나 또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선춘령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고 하니, 선춘령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비문은 사람을 시켜 찾아 볼 수 있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길이 험조하여 사람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숙고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 밖에 고성이 많이 있다는데 어찌 비갈(碑碣)이 없겠는가? 만일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숨막히는 4군 6진 작전: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라!(1) 세종 15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그리고 세종 21년 8월 6일은 그야말로 숨막히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하에 세종이란 한 나라의 CEO가 얼마나 스피디한 의사 결정과 전략 수행 그리고 기회를 잡는 순간 포착력을 보여줬는지 잘 보여주는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4군 6진 영토 회복 작전. 이때 나라의 지금 경계가 확보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만주는 원래 고구려 영토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발해에 속하여 2백년 동안이나 나라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흔히 만족족, 다시말해 여진족이란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의 후예로 우리와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으나, 두 제국이 무너진 다음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토를 두만강과 압록강 안으로 보려는 그릇된 .. 2009. 2. 3.
세종의 준엄한 꾸짖음 1. “만약 한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는 자가 있다면, 감사와 수령에게 죄를 묻겠다.”(세종 원년 2월 12일) 2. “사옥관(司獄官)이 마음을 써 살피지 아니하여 수인(囚人)이 큰 추위와 무더위에 혹은 질병에 걸리고 혹은 얼고 굶어 비명에 죽는 일이 없지 않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중외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따라 무시로 친히 살피고..구호하라. 그 중 마음을 써 봉행하지 않는 자는 엄히 규찰하여 다스리라.”(세종 7년 5월 1일) 3. 국가 CEO라는 직업은“오로지 애민하는 것이다.”(세종19년 1월 22일) 나라 안이 온통 혼란스럽고, 서민들은 생계가 끊겨 갈 곳 없는 안타까운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국가 경영이 문제다. 단언적으로 말하자면, 백성을 위해 국가 경.. 2009. 2. 3.
태종-세종 두 부자의 팀 플레이: 대마도 정벌에서 배울 점 고려말-조선초의 왜구 문제는 대왜관계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다. 고려 멸망 원인의 하나가 왜구의 끈질긴 노략질과 그로 인한 국력 피폐 현상이라고 볼 때, 왜구소탕작전은 조선으로써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태종 때에만 하더라도 왜구의 침입이 무려 64회나 될 정도였다. 태종-세종조 때의 온갖 화기 개발과 수군 정비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시도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 원년 6월에 수행된 기해동정(己亥東征, 즉, 대마도 정벌)은 바로 왜구라는‘악의 축’을 끊어내려는 태종-세종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때는 세종 원년 5월 25일. 두 임금은 한강정 북쪽에까지 나아가 일선으로 출발하는 유정현 함대를 전송하며 승전을 격려했다. 이 작전의 결과는 대 성공. 군선은 6월 20일 대.. 2009. 2. 3.
세종의 휴가 100배 즐기기 "내가 올 때 도로가 극히 평탄하여 여기에 이르렀다. 궁전 역시 장대하다. 이와 같이 큰 폐를 짓고 여기에 편안히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 등창으로 고생한 세종은 신병 치료를 위해 종종 온천으로 휴가를 갔는데, 휴가를 가고 오며 보게 된 백성들의 노고에 대해 경영자로써 느낀 자기 심경을 피력한 말이다. 그 무렵, 임금이 온천행을 할 때에는 어떤 행차가 필요했을까? 당연 가마와 마차가 필요했을 것이고, 행렬이 지나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야 했다. 가마꾼만 해도 대략 500여명이 필요했다. 물론 욕실과 거처도 새로 지어야 했다. 또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을 접대해야 하니까, 임금이 지나는 길에는 실로 엄청난 민폐가 뒤따랐다. 문제는 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래에서는 알아..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