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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10) * 리더는 ‘근본적인 문제’에 골몰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가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면, 결국 그것은 가장 큰 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 CEO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서로가 통하지 못하는 절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생명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 CEO는 무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벽을 넘어 서로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없다면, 실제 ‘소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언제나 개개인이 갖고 있는 영감은 표현을 기대한다. 그 기대에 부응하라. * 전국적 범위 및 글로벌 단위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웍 인프라를 구축하라. 이전에는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커뮤니케이션 툴(tool)을 간단하고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9) [‘한글’ 대선언: O/S를 수출하라 ] 세종이 새로 28자의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것은 우리 백성만이 아닌 세계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생화학과 제어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세계 문자를 유전학적 입장에서 연구한 결과 한글이 가장 체계적, 독창적, 과학적인 글자임을 깨닫고 한글은 세계 알파벳이라고 세계적인 과학잡지 디스커버리지에 「쓰기의 정확함」이란 제목으로 발표하여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온 세계에 극찬한 바 있다.” 더구나 세종은 「훈민정음」소스 코드를 풀어 누구든지 쓸 수 있는 오픈 아키텍쳐(open architecture)로 만들었으니, 이러한..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8) [‘한글’은 지금 서바이벌 게임 중] 600여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이제 우리는 세종의「훈민정음」창제로 말미암아 ‘언어의 문자화’가 가능해져 이제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글이 헤쳐 가야 하는 현실은 결코 녹녹하지만은 않다. 사실 ‘한글’은 온갖 종류의 외국어ㆍ외래어 및 ‘혼어(混語)’들에 둘러 싸여 있다. 인류 역사상 언어 문자의 상실은 항시 그 민족의 쇠락과 멸망을 가져 왔다. 지금 불고 있는 세계화는 결코 단일성ㆍ순혈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장 원리는 무차별성이 그 특징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글은 위태롭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만큼 한글이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때도 없었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한글’은 스스로 생존의 길을 제대로 찾아 나가고 있는..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7) [우리 생각을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말을 한자로 적다가 조선에 이르면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마저도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하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다보니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으로 우리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말이 아니어서 우리의 생각을 우리 식대로 올곧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때 글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아무나 글을 알아서도, 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고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뭇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신비한 신적(神的) 존재로 인식될 만하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문맹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그것이 세종이 국가 CEO가 되면서 맞닥..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6) [마침내 비밀 TFT의 존재가 드러나다! ] 「훈민정음」창제와 관련되어 중요한 기관의 하나가 ‘언문청(諺文廳)’이다. 이 조직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세종 26년 실록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의사청(議事廳)’이 ‘언문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언문청이「훈민정음」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무 기관이라면, 그것은 적어도「훈민정음」원안이 창제된 세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이미 조직되어 활동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세종 28년 11월 8일에 가서야 실록에는 ‘언문청’이 설치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다는 점이다. 세종 28년 11월은「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세종 28년 9월)된지 2개월 후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을 다 만들어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5) [경험을 아웃소싱하라] 이 무렵 요동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유배와 있었다. 그는 티베트 문자 계통인 파스파 문자에 대해 음운학적 조예가 깊었던 학자였다. 알다시피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몽고)의 원세조는 1269년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로 하여금 범어 계통의 음소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바탕으로 음절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이 문자를 개발한 목적은 여러 민족들이 쓰는 다양한 문자를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세종이「훈민정음」을 창제하기 150년 전의 일이다. 세종은 이를 연구시켜「훈민정음」개발에 벤치마킹 사례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파스파 문자와 「훈민정음」은 음소문자로서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점, 아래로 내려 쓰는 점 등에서 유사점을 보.. 2009.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