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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130

[창조의 CEO 세종] 인재 경영을 하라 민주주의가 싹트는 근대 이전 한 나라의 국가 경영권을 다른 세력이 잡는다는 것은 결코 무혈(無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요순시대에나 가능했을런지 모른다. 조선은 창업을 하며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선죽교를 붉게 물들인 피는 가장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피는 권력을 잡고, 위엄을 세우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신하의 범주 안에서 충성을 다짐하던 인물이 갑자기 국가 경영권을 탐내며 대권 도전에 뛰어들었다면, 그는 반드시 ‘적(敵)’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그렇게 창업된 나라였다. 이렇듯 역성혁명에 반대한 자들이 흘린 피는 세종이 CEO로 취임하던 조선 창업 27주년 되는 해에도 여전히 그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혁..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전문가로 육성하라 세종의 경영 방식은 ‘전문성(expertise)’과 ‘관계성(relationship)’에 근거한다. ‘전문성’이란 지식을 생산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관계성’이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통해 일을 진행하기 위한 우호적인 관계를 말한다. 세종의 ‘전문성’은 그의 지식의 범주와 깊이에서 드러나며, 그의 ‘관계성’은 구체적으로 ‘감동 경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학습 관리 시스템을 가동하라] 그리하여 세종은 자신의 멤버들이 한 두 가지의 전문성 - 즉, ‘주특기’ - 을 갖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그는 경연관들에게 ‘전경지학(專經之學),’ 즉 한 가지 경(經)이나 사(史)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정통할 것을 지시했다. 다시 말해,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소신..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CEO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세종은 16세부터 이수(李隨)에게 배우기 시작해 남다른 호학열로 많은 지식을 축적했다. 이수는 생원시험 1등 출신의 학자로 세종이 CEO가 되기 전 성균관은 그를 세종의 스승으로 천거한 바 있다. 세종의 유명한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모습은 다음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작은 병이 있었는데도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태종은 환관을 시켜 책들을 다 가져오게 하였다. 오직 구양수(歐陽修)와 소식(蘇軾)의 글만이 옆에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았다. 취임하여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식사 중에도 반드시 좌우에 책을 펼쳐 놓았고, 혹은 밤중이 되어도 힘써 보아 싫어함이 없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선례(先例)로부터 배우고, 다시 선례가 되어라 세종은 결코 전임 CEO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다. 비록 중국과 고려의 옛 제도에서 많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했지만, 이는 벤치마킹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세종이 중국의 옛 제도를 참고하면서도 한편으로 조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다양하게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CEO로 취임 후 세종이 처한 현실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세상은 세종이 CEO가 되기 전에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크게 중국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너무나도 빈약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세종, 현실을 직시하다] 세종은 조선을 과거에 묶어 두지 않았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현재를 직시하는..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문제는 매너리즘이다 국가 경영 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웃소싱 되어, 시간을 두고 점차 한국화 되었다. 유학은 그런 차원에서 오랜 기간 서서히 민(民)ㆍ관(官) 사이에 퍼지다가 마침내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국 하에서 조선의 창업자들에게 발굴되어 국가 경영 철학으로 크게 강화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매너리즘에 있었다. 모든 것이 굳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의례 즉, ‘형식’만이 권력을 치장하고,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현 시대의 국가나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어느 조직이든 ‘혁신’은 그 자체로 어디로 굴러 가든 바퀴를 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조선의 국가 경영 이념인 주자학에서 말하는 예(禮)는 모두 고대 중국의 성왕들이 창조한 이상적인 사회를 상세히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 2009. 2. 3.
[창조의 CEO 세종] 빌려 온 것도 우리 것으로 만든다 세종은 ‘벤치마킹(bench marking)’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대가였다. 그가 새로운 CEO로 사령탑을 맡은 신생 조선은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활발한 문화적 교류와 선진 외래문화의 흡수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근거한다. 그만큼 그 시대는 국가 경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빌려와야 했고, 찾아내야 했으며, 또 참고로 해야 했다. 그것이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경영 방식이었다. 한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경영 방식, 그것은 원칙적으로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 바꾸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세종의 경우, 국가 CEO로서 창업 이념의 계승이나, 경영의 대상인 백성을 위한 풍요로운 사회건설 등은 결코 바뀔 수 없는 대.. 2009. 2. 3.